“전태일과 새로운 복음 이해”
“전태일과 새로운 복음 이해”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11.25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2년에 썼던 "전태일과 새로운 복음 이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전태일

최근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분이 전태일 재단을 방문했다가 재단의 거부로 방문하지 못하고 뒤돌아섰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격세지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전태일이 누군지 모릅니다. 또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노동과 관련된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신앙과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거나 조금 더 오래 생각하면 그런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빨갱이, 좌파 혹은 불손한 사람들이라는 사고가 이미 머릿속에 자
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현상이 바르고 신앙적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독재의 칼날이 서슬퍼랬던, 모두가 숨 죽이고 죽은듯이 살아야만 했던 시절인 1970년 11월 13일. 22살 꽃다운 나이의 청년은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서글픈 이 땅에서 사라져 가야만 했다. 평화시장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 그가 온 몸을 불사르며 숨막혔던 시대에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피맺힌 짧은 절규였다. 그의 절규는 빵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법을 넘어서는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근로기준법에 있는 것 만큼은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취급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불의를 보고도 모든 사람들이 체념하고 비겁으로 숨죽여 살고 있을 때,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에게 우리도 인간이라는 큰 외침이었다."-기사에서 인용-

안병무는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그의 죽음 속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은'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가 민중이고, 민중이 예수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독특한 저항적 기독교 사상인 '민중 신학'을 창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병무는 정통에 의해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한 번도 주류 기독교에서 주목받아 본 적이 적이 없습니다. 유병무나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기만 해도 그는 이미 불온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가 된 사람이 전태일 재단을 찾는 시절이 된만큼 그리스도인들 또한 전태일과 유병무 그리고 민중신학이라는 가려졌던 복음이해를 새롭게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민중(해방)신학
남미에서 주로 강조되었던 해방신학은 관행이 되어버린 오랜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금 예수의 복음에 주목하게 하였습니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맥을 같이 하는 한국의 자생적인 해방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신학을 통하여 우리는 이른바 "세계 경제 질서"가 얼마나 엄청난 구조적 불의에 의해 각인되어 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자유로운 국제적 시장 질서가 10억 인구를 굶주리게 하는 예속과 착취, 억압의 체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이 체제가 부유한 사람들이 구조적인 폭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굶주리게 만드는 질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따라서 해방신학이 정죄하는 것은 억압이지 억압자들이 아닙니다. 헤겔은 주인이 그 본질상 노예와 관련되어 있음을 매우 탁월하게 서술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의 본질은 그가 부리는 노예와의 관계 속에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목표로 설정해야 할 것은 이 둘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는 새로운 형태의 의사소통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것임을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숙제입니다.

이것은 "제1세계"의 교회들이 억압당하는 "제3세계" 민중들의 해방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도 이제는 "제1세계"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역시 단순한 '영혼 구원'의 선교방식에서 벗어나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구조적 가난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고 그 해결에 노력하고 참여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영혼 구원'이라는 단순한 교리 이해에서 벗어나 복음이 근원적으로 해방의 기쁜 소식임을 삶으로 실천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곧 복음의 통전적인 이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번영과 부를 추구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억압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복음이 의도하는 대로 억압자와 억압당하는 자 모두가 해방되는 명실상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기독교 역사 이해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최초로 인정한 312년 밀라노 칙령을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는 참된 복음의 실현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타락의 무대'를 열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복음으로 합리화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주류 기독교는 한 번도 그렇게 변질된 복음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4세기의 카이사르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도권에 진입하고 출세합니다. 한편 카이사르를 모시고 정통교리를 확정하는 공의회가 열릴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숙청당했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가 세워졌고, 변절했던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고위 관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간단하지만 이 한 마디, 한 마디 선언들에 담겨 있는 함의들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우리의 벽은 금으로 번쩍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하시고 죽어가고 있다." 일일이 인용하지는 앓겠지만 히에로니무스뿐만 아니라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역사는 예수를 죽인 로마 제국이 마침내 그리스도교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제국이 그 오랜 번영을 마감한 후에도 그리스도교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잔치판에 예수님은 들어서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그분이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머리에서 가시면류관이 벗겨지고 대신 금관의 면류관을 쓰시고 교회의 높은 곳에 '정복자'와 '지배자'로 추앙을 받게 되심으로 자신의 복음과는 상관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 이해를 위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공인 이전(특히 서기 200년 이전의)의 교회를 살펴보고, 복음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당시 상황 속에서 조명해 봄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에 담겨 있는 참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분신한 전태일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던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이해하고 억압자와 억압당하는 자 모두가 해방되어야 할 대상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과 복음 이해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이미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을만큼 화석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학을 전공하고 기독교 밖에서 예수님을 만난 한승훈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렬한 기독교적 종교 경험을 하고, 열정적으로 교회의 의례에 참여하면서 근본주의적인 신념을 키운 한국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좌파의 배후는 북한이며, 곧 그들은 반기독교적인 사탄의 세력이라는 목사의 설교를 언론과 사상의 자유와 같은 가치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임당하는 여성과 아이들보다는 그곳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이해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결론만 말하면 반공은 복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복음적이지도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역시 전혀 복음과 상반되는 기독교 이해입니다.
 

"그런 이에게 신은 없다거나, 기독교가 거짓이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의 존재 근거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져 즉각적으로 반발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그가 교회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는 그 의심이 자신의 개인적 구원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믿음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 느끼는 방법, 몸의 반응마저 결정한다. 그러므로 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이 전인적인 체계를 깰 수 없다."

그가 본 것은 정확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방신학과 해방신학이 강조하고 있는 해방의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영원히 잘못된 복음, 다른 복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복음 이해 속에서 폭넓은 통전적인 신앙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힘에 대한 갈망은 국가주의나 제국주의를 절대화할 것입니다. 풍요에 대한 갈망은 자본주의를 절대화할 것입니다. 더 큰 공동체의 한 몸이 되고자 하는 갈망은 전체주의를 절대화할 것이며, 세계에 대한 지적 갈망은 과학을 지식 추구의 방법이 아니라 맹목적 도그마의 목록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복음을 욕망으로 재해석하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욕망의 방향과 믿음의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 그것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은 세계의 질서 속에 안주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오랜 진화를 통해 질서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무리 강자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거짓일지라도 질서에 대한 위반은 반감과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종교경험은 그 질서를 뛰어넘는 급진적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입니다. 그러나 체제는 그 경험의 해석을 통제함으로써 급진적인 영성을 통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적인 영성을 꿈꾸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해방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혁명적인 영성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0-2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