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12.16 2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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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의 글에서 제 눈에 들어온 탄식입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으로 사회가 왜 이렇게 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지나갔습니다. 전태일님 때에도 공순님과 공돌님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양반 제도가 있었을 때는 더했습니다. 일본 치하에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왜 이렇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커스 보그는 이것을 ‘문명의 정상성’이라 불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명의 정상성’이라는 말 하나만 이해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살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명의 정상성’에 도전하여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개념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세계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계관의 정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의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피조 된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도하시고 궁극적인 역사의 종말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역사의 어느 한 순간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먹고 마시는 일에 전념하느라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은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이 말은 우리가 팍팍한 현실의 삶에 전념하느라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이란 바로 이렇게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통치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 열 명이 소돔을 구원해야 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새기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문명의 정상성’에 도전하는 삶이며 ‘문명의 정상성’을 극복하고 인류 모두가 정상으로 인정하는 사회와 다른 사회를 보여주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른 사회, 다른 문화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문명의 정상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세계관이며 가치관인 ‘문명의 정상성’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소속 내지는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언급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며 자신의 구원에만 천착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정상성’에 도전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방향을 잃은 표류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다른, 다시 말해 ‘문명의 정상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는 원래 그런 곳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가 이렇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명의 정상성’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실제를 보여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점과 죄악을 보고 거기에서 돌아설 수 있는 계기와 힘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의인 열 명을 다시 언급하고 싶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대략 오만에서 십만으로 추산되는 소돔의 인구에 비해 열 명이란 아주 적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의인이 된다는 것이 그처럼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인의 길, 다시 말해 하나님의 꿈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선택하는 사람의 수가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망의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이며, ‘문명의 정상성’에 익숙해진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자기 하나 달라진다고 세상이 변하겠느냐는 자조와 ‘문명의 정상성’은 결코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세상에 대한 신뢰와 두려움이 그만큼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 먼저 변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변화를 요구하거나 지적하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의인 열 명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넓은 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교회에 나오는 것이 곧 좁은 문을 선택한 것이라는 이해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의인의 길은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교회 안의 넓은 길 하나만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길은 부자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깨끗한 부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높은 뜻’이라는 다른 형용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칭찬을 받으며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최고의 지성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까지 가진 우리 시대의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이 정말 과부들의 것을 빼앗아 그것을 가졌다는 지적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학자들은 오히려 과부들을 공궤할 수 있는 헌금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로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고 그렇게 헌금을 많이 하는 자신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그들 시대의 ‘깨끗한 부자’였을 것입니다. 유대교는 기부와 사회적인 공헌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입니다. 그 당시도 그랬을 것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일에 특별히 열심이었을 것입니다. 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다는 지적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하나님의 꿈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바로 두 렙돈을 헌금으로 드린 과부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면 두 렙돈이 가진 전부인 과부와 같은 사람이 그들 가운데 없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증거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다는 예수님의 표현은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다는 지적이었으며 그래서 교부들은 부자들의 부가 가난한 자들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설교했던 것입니다.

‘문명의 정상성’을 인식하며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지적을 알아듣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오늘날 ‘깨끗한 부자’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스스로 자신의 종교적인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는 그야말로 가혹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회가 된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왜 이런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쉽게 보지는 마십시오. 좁은 문을 지나야 합니다. 외로운 길입니다. 환난과 역경이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임을 절감하며 ‘문명의 정상성’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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