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12.20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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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백신확보를 문제 삼아 정부를 맹공격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알아야 할 정부가 선제적으로 백신확보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대처 모범 방역이라는 정부를 흠집 내려는 것입니다.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이번 정부 때문에 못살게 되었다고 대통령을 맹비난합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당은 정부의 결정을 잘했다고 할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정부가 성급하게 백신을 확보하느라 국가의 재정을 낭비했다느니, 혹은 정부가 국민을 백신 부작용의 실험대상으로 만들었다느니 하면서 정부를 맹비난할 것입니다. 대통령을 비난하는 일은 약방의 감초처럼 변함없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야당의 역할이려니 하고 지나가면 되는데 문제는 거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서초동 법원 앞에서 윤총장의 회갑 떡을 돌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제 페친이 된 분들 가운데 부산, 경남에 사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결코 지역을 페친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구 경북지역 분들은 정치적 성향을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제가 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태극기부대와 같은 성향의 분들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분들과 한 번 부딪히면 사생결단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폭력적인 대화는 가급적 차단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대구 출신의 제 조카는 태극기부대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지역 분들이 페친을 신청해오면 그분들의 정치적 성향을 살피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정치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해도 이미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정치적인 태도를 가지는가는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더구나 그것이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간단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로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정치에 관한 예수님의 입장이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말의 방점은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의 의미는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짜 소속이 하나님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스파이’라고 하였습니다. 실감이 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오늘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문빠와 태극기부대로 극렬하게 나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와 같은 현상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체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해 생기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장간에서 나온 <절대자유를 갈망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세상의 무정부주의와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치체제가 무정부주의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곳의 공동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배용하목사는 아나키즘의 어원을 설명합니다. Anarchy의 접두사 an은 ‘anti'가 아니라 ’not'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정부를 반대하여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아니다’ 다시 말해 정부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이란 지배가 없는 상태를 말하고 아나키란 지도자가 없는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처음 있던 아키(정부)가 노아의 방주(ark)였다고 말합니다. 방주가 하나님의 통치원리아래 하나님이 다스리는 일종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방주라는 정부를 설계하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노아는 무려 백 년(혹은 백오십 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담을 정부를 담을 그릇을 만든 것입니다.

방주에는 노나 돛이 없고 심지어 닻도 없었습니다. 바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저 방주 안에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방주 안의 생명들을 돌봤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질서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들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그 많은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세상의 정부들과 비교하면 무기력한 정부였습니다.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여건에 따라서 움직이는 정부였고 오직 하나님만이 방주의 운명을 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아나키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방주가 맞아야 했던 대홍수는 통제가 불가능한 홍수였습니다. 이 홍수가 의미하는 바는 세상이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자체가 통제 불가능한 홍수와 같습니다. 인간은 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단번에 가라앉는 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잘 만들어진 배는 좀 더 오래 떠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배도 견디지 못하는 큰 격랑이 언제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방주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홍수를 견딜 수 있는 아무 도구도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유선형도 아니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동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물결이 밀려들어도 방주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대홍수를 견디고 마침내 뭍에 다다랐습니다.

방주가 최초의 그리스도교 정부였다는 배용하님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으로서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외에는 세상에 저항하거나 통제할 어떤 도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가난했고 저는 신용불량자였고 형제들마저 외면한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를 돌보시는 이가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저를 이끌고 저를 보호하시고 저에게 공급하셨습니다. 그분이 저를 통치하셨습니다. 저와 저희 가족은 작은 정부였습니다. 우리는 세파에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지만 우리는 무사했습니다. 아니 가장 안전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와 저희 가족의 삶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 고마운 책을 잘 읽었습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입니다. 아무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게서 보듯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너무나 무력해서 한심해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철옹성안으로 들어가는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치적인 사람들입니다. 아니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속정부에 올인하여 야당과 여당으로 나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선택은 가이사냐 하나님이냐로 나뉘어야 합니다. 물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치 자체를 맡기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 무방비 상태로 보이지만 실상은 어떤 대홍수에도 침몰하지 않는 방주 안의 삶(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을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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