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주교회의 의장, “교회는 변해야 한다””
독일 주교회의 의장, “교회는 변해야 한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1.06 2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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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주교회의 의장인 배칭 주교의 이야기입니다. 개신교가 금지하고 있는 것을 가톨릭 역시 동일하게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혼의 문제에서는 오히려 더 엄격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피임과 낙태에 관한 입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제 눈길을 끈 것은 영성체를 공유하는 문제입니다. 배칭 주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영성체를 공유하는 문제에 관해 양측이 서명한 문서를 교황청에 제출했습니다. 그 문서에 대해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강하게 반대하면서, 성체성사의 이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차이는 “여전히 아주 커서” 서로가 다른 교회의 성체성사(나 성찬례)에 참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신앙교리성의 태도가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십 여년 전 저는 목회자 영성수련회라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관상기도를 배우고 훈련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강사 중에 두 분은 신부님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부인 고신부님과 러시아정교 신부인 최신부님이 관상기도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고신부님은 렉시오 디비나를 설명해주셨고, 최신부님은 부정신학을 언급하셨습니다. 지금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들은 바 있는 목사님들이 많지만 당시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와 개신교가 만나는 일이 녹녹치 않았습니다. 고신부님의 강의는 그런대로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신부님이 등장하면서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삼위일체 성상(이콘)이 문제였습니다. 최신부님이 이콘을 앞에 세워놓고 강의를 시작하려하자 한 감리교 목사가 핏대를 올리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이지요. 최신부님은 웃으며 일단 들어보시라고 했지만 핏대를 올리던 감리교 목사는 강의를 듣지 않고 나가버렸습니다. 한 예이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부분들이 조그만 충돌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더 큰 문제없이 모임이 잘 진행되었습니다.

모임을 주관하신 목사님들은 여러 나라의 여러 수도원과 공동체들을 다녀오신 분들이고 가톨릭에서 하는 향심기도회나 신부들이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하는 30일 대피정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서 모임을 잘 이끄셨습니다. 그 모임에서 저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강사로 참여하신 고신부님과 최신부님이 설거지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고신부님이 수사신부님이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익숙한지 몰라도 적어도 제가 아는 개신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겐 그분들에게 들은 강의 내용보다 설거지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후로 저도 우리 교회에서는 물론 다른 교회의 집회를 인도하게 되는 경우 설거지를 꼭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찬이었습니다. 모임이 진행되는 내내 새벽마다 성찬이 진행되었습니다. 신부님들과 목사님들이 돌아가며 각자의 방식으로 성찬을 진행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실 당시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파격인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신부님을 사귀게 되고 여러 가톨릭 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을 했지만 그때처럼 함께 성찬례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초기교회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성찬은 초기교회 예배의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의식이 아니라 그냥 공동의 식사였습니다. 하지만 공동의 식사라는 것은 단순히 함께 먹는 시간이 아닙니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함께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당연하거나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부라’라고 하는 공동의 식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형제애를 나누는 일종의 거룩한 식사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과의 식사는 그들의 정결의식을 깨뜨리는 일종의 파계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환상을 보게 되고 이방인들과 정결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의 전통은 확고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보고 황망히 자리를 떴던 일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정결예식과 하부라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깨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다시 유대인들처럼 벽을 쌓은 것입니다.

물론 성찬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이해가 다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게 다른 것일까요. 그게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부정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잡히시던 날 밤 마지막 만찬에서 보이시려던 것이 그렇게 순수성을 지키라는 것이었을까요. 옳은 것을 놓고 서로 싸우고 갈라지라는 것이었을까요. 저는 성찬의 의미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결의를 다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사람들의 먹거리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내주라는 것입니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회적인 장벽들을 철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들여 허무신 것을 인간들이 다시 공들여 허물 수 없는 더 높은 벽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반역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제가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오늘날 영성체의 문제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던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이 그리스도인들을 가르는 막힌 담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정신을 망각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길을 답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회적인 장벽을 철폐하셨습니다. 영성체의 공유는 그 회복의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최근 정교희의 신학책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정교회의 부정신학은 오늘날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신학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알 수 없다는 의미(아포파시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피조물과 창조주의 자리를 지키는 인간의 겸손입니다. 인간이 제 자리에서 창조주를 바라볼 때 인간은 결코 자신의 옳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교회 신학은 정의를 내리지 않고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는 부정신학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교리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와 같은 태도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가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만들지 않고 지역교회의 의미를 살려 있는 곳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 자체가 그것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교회의 이 같은 태도를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신교의 역사는 옳은 것을 주장하며 갈라지는 역사입니다. 분열이 사단의 역사라는 사실은 너무도 적확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랑의 띠로 묶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야기된 예배의 중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돌아보게 합니다. 저는 다른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그 중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 됨을 힘껏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는 이 말을 꼭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켜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참여했던 목회자 영성 수련회는 일종의 새 시대의 서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공유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인 실천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성령의 역사가 코로나 이후의 교회의 역사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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