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성서이해
안타까운 성서이해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1.17 09: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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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사부부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분들은 주중에 카페를 하고 주말에는 예약제 식당으로 바꾸었다가 주일에는 예배당으로 변신하는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하는 이중직 혹은 자비량 목회의 한 모습입니다.

이런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기존의 교회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회는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전이며 성전인 사람들의 모인 곳이 교회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예배당이 중심이 되고 그 예배당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통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결국 다다라야 할 곳에 다다른 것입니다. 건물이 본질을 잠식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교회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중직이나 자비량목회가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 이중직이나 자비량목회는 근본적으로 돈을 미워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돈을 무시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그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저의 이해는 완전히 다릅니다. 결국 이중직이나 자비량목회의 목적은 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돈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 돈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부자 젊은이의 기사에서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부자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는 예수님의 요구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드러난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 젊은이의 제일의 관심사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재산(돈)이었습니다. 사실 그도 전에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재물에 관한 사항 역시 그는 준수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 이상의 일을 정하여 실천하였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가장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부와 자선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사회적 기부를 하는 종교는 없을 정도로 유대인들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가난한 이웃들에 관한 배려는 그 어떤 종교보다 철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부자 젊은이가 재물에 대해 가진 자부심 여기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키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완벽했고 그만큼 그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이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런 그에게 돈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젊은이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돈을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런 부자 젊은이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의 재산이 부자 젊은이보다 적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든 적든 모든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재산(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제자들이 돈이 있어야 예수님을 좇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제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는 일에 ‘올인’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제일의 가치로 삼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더해 주실 것들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질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가 바뀌는 순간 그 사람은 울상을 짓고 근심을 하며 떠나간 부자 젊은이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중직이나 자비량목회가 앞으로 목사들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심히 잘못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일에서 돈은 결코 동인動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성서이해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에게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는 네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사실 저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한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위도식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비록 제가 한 일이 글 쓴 것 외에는 별로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 저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저의 애통해하는 마음도 아십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들끓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열정 역시 주님은 보실 수 있으십니다. 

오늘날 ‘헤롯의 누룩’에 감염되어 일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취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물론 그 일에 인간의 협력이 절대적입니다. 그 때 인간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완전히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또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방법(이중직이나 자비량목회와 같은)을 모색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완전히 무력한 삶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올바른 하나님 백성의 자세라는 것을 저는 늘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돈으로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해지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언급했던 어떤 부부목사가 하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모색이 아니라, 세이비어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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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2021-01-17 21:11:01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