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유혹'을 성찰하다.
순교의 ‘유혹'을 성찰하다.
  • 양수연 기자
  • 승인 2021.01.24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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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엘리엇을 통해 본 신앙의 본질과 트럼프.
토마스 베케트의 살해 장면을 그린 작품.
토마스 베케트의 살해 장면을 그린 작품.

 

최근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트럼프 추종자들의 미 의회 침입 사건에 대해 요새 말로 ‘신박한' 관점의 칼럼을 썼다. 그는 T.S. 엘리엇의 1935년 작품 <대성당 살인사건>의 구절을 인용한다. 

“마지막 유혹은 반역죄이다. 그것은 그릇된 이유로 정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The last temptation is the greatest treason: To do the right deed for the wrong reason.)

슬라보예 지젝은 지난 주 친러시아 영국 언론인 RT에 기고한 칼럼에서 의회에 침입한 트럼프 세력이 ‘그릇된 이유'를 관철시키기 위해 ‘정당한 행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다. ‘서구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며 트럼프와는 정반대의 노선에 있는 지젝이 미의회 침입을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지젝의 주장에 대한 의미는 말미에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위대한 보수주의자 T.S. 엘리엇의 <대성당 살인사건>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지젝의 칼럼 내용을 차치하고라도 이 작품은 신앙의 본질을 일깨우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릇된 이유로 정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왜 반역인지에 대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베케트 대주교의 순교를 다룬 T.S.엘리엇의 작품

1935년, T.S.엘리엇은 캔터베리 축제를 위해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1118~1170)의 순교라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시극 <대성당 살인사건(Murder in the Cathedral)>을 발표한다.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와 헨리 2세 사이의 악화한 관계 끝에 베케트 대주교가 살해당한 사건은 왕권과 교권의 충돌이라는 영국 역사의 어두운 측면이다. 그러나 베케트와 헨리 2세가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헨리 2세는 교권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속의 맛과 멋을 함께 즐겼던 친구 베케트를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막상 대주교가 된 베케트는 헨리 2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베케트는 대주교가 된 이후, 이전의 세속적인 삶과 완전히 단절했고 진정한 성직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교권을 온전히 지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와 베케트의 사이는 계속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고 결국 베케트는 헨리 2세의 핍박을 피해 프랑스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베케트 대주교는 캔터베리 대성당이 있는 고향 영국으로 돌아온다. 헨리 2세와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결국, 헨리 2세 측근 기사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대성당 살인 사건>은 역사 속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가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돌아오는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귀환 후에도 베케트 대주교는 여전히 왕권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베케트를 위하는 척하면서 헨리 2세의 편에 서 있는 유혹자들(tempters)이  있었다. 4명의 유혹자가 차례로 베케트를 찾아와 베케트를 헨리 2세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이라며 신앙의 길과 다른 것들을 종용한다. 베케트 대주교는 이 유혹을 일일이 거절하는데 이 장면과 시로 쓴 대사가 압권이다. 무대 위에 선 합창단은 베케트 대주교의 죽음이 임박해져 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노래로 불안한 분위기와 신화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또한 유혹자들이 베케트 대주교를 유혹하는 과정은 마치 광야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귀의 유혹을 연상하게 한다. 

예수가 받은 세 번의 유혹을 상기해보자. 

마귀는 예수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고 종용한다. 마귀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했고 이에 대해 예수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대답하며 물리친다.

예수를 향한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자기를 경배하면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마 4:10)는 성경 말씀으로 물리친다.

세 번째 유혹은 더 악랄하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아래로 몸을 던져 보라.”고 한다. 이때 마귀는 교묘하게도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당신을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며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강하게 촉구한다. 이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성경에 있다"며 물리쳤고 결국, 마귀는 예수를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물러나게 된다.

베케트 대주교가 받은 4번의 유혹.

T.S. 엘리엇이 창조한 베케트 대주교의 유혹자들도 예수를 유혹하는 마귀처럼 상대를 위하는 척하며 단계별로 다가오지만 복잡한 양상을 가지므로 해설이 필요하다.

첫 번째 유혹자는 베케트에게 “이전의 세속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세속적 삶이란 감각적 쾌락, 맛과 멋을 즐기고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삶을 말한다. 유혹자는 재치와 와인과 지혜(wit and wine and wisdom)의 충만함을 즐기라고 한다. (지혜 역시 세속적인 것으로 지시함을 주목하라.)

베케트는 총명하고 지적이며 세련된 사람이었고 대주교가 되기 전에 술과 낭만을 즐기는 사람이었기에 헨리 2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유혹자는 그때의 생활로 돌아가서 평온하게 살면 헨리 2세가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베케트는 대주교가 된 이후 세속의 삶을 단절했고 완벽에 가까운 성직자의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 유혹을 물리친다.

두 번째 유혹자는 대주교를 내려놓고 대법관(Chancellor)의 자리로 돌아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베케트는 대주교가 되기 전 헨리 2세의 신임을 받아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바 있다. 대법관은 세속적 지위로서는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였다. 베케트는 대법관 시절, 헨리 2세와 함께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향유하지 않았던가.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대주교 보다 대법관의 자리가 즐겁고 중요하지 않겠는가. 두 번째 유혹자는 그런 이유로 대주교를 내려놓고 대법관으로 돌아가면 어떻겠는가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케트는 세속적인 삶을 제시하는 두 번째 유혹도 단호히 거절한다.

세 번째 유혹자는 헨리 2세와 당신이 우정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음으로 차라리 다른 세력과 연합하여 헨리 2세를 제거하는 것이 어떠냐고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펼친다. 그러면 헨리 2세의 폭정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대주교 당신이 승리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베케트 대주교는 이것 역시 거절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헨리 2세를 물리치고 왕이 되는 것은 결코 영적인 목표에 따라 동기가 부여된 것이 아니며, 단순히 하나의 세속적 권력을 다른 세속적 권력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베케트는 갈등 관계였지만 헨리 2세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여기까지 세 명의 유혹자들의 공통점은 최고의 권력을 갖든, 즐거움을 느끼든, 세속적인 삶이 영적인 삶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유혹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번째 유혹자는 어떠한가?

네 번째 유혹자는 이전의 유혹자와는 정반대로 영적인 삶이 세속적인 삶 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유혹은 더 교활하다. 

“순교라는 영광"의 유혹

네 번째 유혹자의 메시지는 바로 순교이다. 금욕적인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순교로서 성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왕에 대항하여 순교자가 되고 성인의 반열에 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성직자로서 물리치기 힘든, 압도하는 말이다. 순교를 안 해도 헨리 2세가 자신을 해칠 것을 알고 있는 베케트였기에 ‘차라리 순교가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마저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유혹은 반역죄이다. 그것은 그릇된 이유로 정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순교란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순교는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순교하려면 순교자의 영광 자체도 바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순교자가 되리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될 것임을 조금이라도 고려한 뒤 순교한다면 그것은 순교라고 할 수 없다. 베케트는 마음 구석에 비집고 올라오는 영광의 욕망이라는 이기심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베케트는 그릇된 이유로 순교라는 정당한 행동을 할 수는 없다면서 유혹자를 물리친다. 동기와 결과가 모두 정당하고 깨끗해야만 한다는 신념의 선언이다.

결국 베케트는 순교가 아닌, 궁극적으로 살해당함을 택한다. 헨리 2세의 말을 오인한 기사들이 베케트를 찾아와 죽였기 때문이다. 

서두에 언급한 슬라보예 지젝의 미의회 침입 사건에 관한 칼럼으로 돌아가 보자. 지젝은 트럼프와 의회 침입 세력이 그릇된 이유로 정당한 행동을 했다며 위의 <대성당 살인 사건>을 이렇게 비유했다.

첫째, 트럼프는 펜스 부통령에게 의회에서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승인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이것은 그릇된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펜스 부통령의 권한 하에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펜스 입장에서는 정당한 행동으로 포장할 수 있다.

둘째, 트럼프 추종자들은 펜스의 대통령 승인을 항의하고 방해한다는 ‘그릇된 이유’로 의사당에 침입했다. 그러나 지젝은 정당한 행동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군중이 봉기함으로써 복잡한 선거 제도와 가짜 민주주의의 가면을 벗겨내는, 시스템 내부의 마지막 포퓰리스트인 트럼프의 실체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일은 평소 민중의 혁명을 주장하는 급진적 지식인인 지젝에게 의미있는 사건이다. 미 의회 침입은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과 거짓된 대중 시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젝에게는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임을 지시하는 것이다.  

안일한 대중이 더 문제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대성당 살인 사건>의 교훈은 실은 이것이다. 이 작품에는 대중이 ‘합창'으로 등장하는데, 대중은 베케트가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다고 할 때 환영하지 않는다. 다시 헨리 2세와 충돌하며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라며 이렇게 한탄한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왕과 귀족이 통치하는 땅,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온 것이지. 차라리 눈에 띄지 않고 살기를 원하노라. 아무 일도 일어나길 원치 않는다. 이제 고요하던 계절이 동요할까 두렵구나.”

변화를 원하지 않는 대중의 모습, 현실에 안주한 대중의 나약하고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모습이 <대성당 살인 사건>에서의 대중의 모습이다.

이러한 대중의 모습은 T.S.엘리엇의 또 다른 명작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도 드러난다. <황무지>는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폐허 속에서 무감각하고 의욕을 잃은 인간 사회를 상징하며 권력으로부터 희생된 인간을 표상하는 것으로도 회자하지만, 엘리엇의 의도는 ‘영적인 상실’의 시대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황무지>의 첫 문장이 왜 “4월은 잔인한 달”인 것인가? 모든 유혹을 극복한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라면 이렇게 한탄하지 않았겠는가? 

“4월은 예수 부활의 달이오. 생명 부활, 영적 부활의 달이 오지만, 안일하고 의식이 마비된 무감각한 인간에게서 무슨 좋은 새싹을 기대할 수 있겠소?”

군중을 의회로 쳐들어가라고 꼬득여놓고 “따라가겠다”던 트럼프는 TV 앞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러한 트럼프를 비난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하지만 트럼프처럼 TV 앞에만 앉아 있는 안일한 또 다른 군중이 존재한다. 변화를 말하지만 변화를 실천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 채 깨어있지 않은 대중 말이다. 세상을 진정 변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이유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로 정당한 행동을 할 의식있는 대중이 있어야 한다. 지젝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양수연 편집장 / <월간 NEW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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