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과 목사가 되시려는 분들에게
목사님들과 목사가 되시려는 분들에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3.06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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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악한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저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더 악한 죄가 있고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는 똑같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는 것은,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사람들이면서도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입니다. 동성애는 특별히 더 악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을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다 이상 죄의 전가를 위해 번제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 번에 드림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아멘을 외칩니다.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동성애자들을 저주하고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가 동성애는 용서하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죄가 있고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근안과 같은 고문기술자가 목사가 되는 것을 반대할 근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가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근안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그렇다면 목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근안과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어도 좋을까요.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근안은 폭력에 물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잔인하게 사람을 유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폭력으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올바른 이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라는 것을 배우고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영향력을 포함하는 모든 폭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은 힘과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단지 이근안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형교회 목사들 모두가 힘과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주인인 곳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힘과 영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십니다. 완전히 힘을 포기하고 무력해진, 또는 산산이 부서져 모든 힘이 빠져버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흐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도대체 자랑할 것이 없어 약함을 자랑합니까.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을 통해 그것을 반복해서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무력해졌을 때, 다시 말해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과 같은 자신이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약할 때 강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또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근안과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가 저지른 죄가 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폭력의 삶을 살던 그가 폭력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왕위서열 두 번째의 왕자로서 어마어마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가졌던 힘과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래서 그는 40년간이나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적한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을 떨어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힘과 영향력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무력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완전히 무력해진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근안과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그 역시 모세와 같은 광야에서의 삶이 필요합니다. 완전히 폭력에서 벗어나 무력해질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라도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철 지난 이근안의 이야기를 한 것은 전두환님의 아드님 전재용님께서 목사가 되겠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재용님도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전두환님의 죄도 용서 가능합니다. 그의 아드님이 목사가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임금보다 큰 힘을 휘둘렀던 전두환님의 아드님께서 힘과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약함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오랜 시간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겪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목사가 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근안과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힘과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김장환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재용님 같은 분이 목사가 되려는 것입니다.

이근안이나 전재용님 뿐만이 아닙니다. 가수나 연예인이나 방송인이나 교수나 의사, 법조계 출신의 많은 목사들과 이 시대를 풍미하는 성공한 목사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은 자신이 가진 힘과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모세처럼, 바울처럼, 완전히 무력해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하십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은과 금,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힘과 영향력이나 어떠한 강압적인 폭력도 없을 때, 온전히 우리가 무력해졌을 때,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재용님도 그러실 수 있을 때 목사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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