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지고 작아지는 교회를 향하여
낮아지고 작아지는 교회를 향하여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3.23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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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친구를 만났다. 저녁을 함께 먹었다. 친구가 순복음교회 이야기를 했다. 순복음교회의 예배 영상에 순복음교회 예배에 늘 있는 환자들 치유의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믿지도 않는 사람이 그 영상을 보고 자신의 환부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를 했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친구는 조용기 목사가 없는데도 그런 치유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친구에게 나는 기적을 보고 믿는 신앙은 결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의 행적과 이후 다시 찾아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던 군중들을 예수님이 거절하신 이야기를 하면서 기적신앙으로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친구가 듣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이미 그의 귀가 닫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신앙이해로는 내가 말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다만 목사인 내게 대들었다가는 화가 미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이것도 그의 그리스도교 이해 중 하나이다)

내 친구이지만 나는 내 친구에게 복음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그에게는 이미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복음이해가 있다. 그걸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이해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그걸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들을 귀가 없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어제도 그랬다. 하지만 안타깝다.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이해는 너무도 단순하고 너무도 유치하다. 그들은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열심을 내려하지도 않는다. 치열한 신앙의 삶이란 피안의 세계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천국환송잔치’가 열린다. 결국 천국이란 자기 맘대로 가는 곳이 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다녔으니 그것으로 끝이다. 도무지 할 말이 없다. 기가 막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나는 이 짧은 말씀에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큰 것에 쏠려 있다. 천국의 관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서도 누가 큰 가가 궁금하다. 한국의 개신교 교회 역시 이들의 관심과 동일하다. 이들의 관심은 온통 큰 것이 쏠려있다. 그래서 세계 최고를 꿈꾼다. 한국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몰려 있는 것은 그런 관심들이 이루어낸 비극이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교회가 커지는 것을 기뻐할 수 없다. 그러나 큰 것에 대한 관심,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이 천국까지도 이어져 천국을 오염시켰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교회가 커진 것에 절망해야 한다. 자신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의 암 덩어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기적인 조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가 되었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쓸데없는 책을 썼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한국의 개신교 교회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독일의 악마가 한국에 와서 출세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 교회가 생긴 것을 보면 이러한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개신교 교회는 거의 대부분 목사가 사재를 털어 시작된다. 물론 순수한 열정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그것을 드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본색이 드러난다. 특히 교회가 커지기라도 하면 확연하게 달라진다. 육십년 대부터 팔십년대까지 개신교 교회는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런데 정말 생기는 족족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커졌다. 정말 커졌다. 그것을 사람들은 추호도 의심 없이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특히 기적을 행하는 곳들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순복음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들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만이 아니다. ‘순복음’이라는 간판을 단 교회들은 모두 같은 디엔에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열정적으로 기도하며 병 낫기와 방언을 구한다. 그리고 추호도 의심 없이 그것을 성령의 임재로 인식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그 자리에 왔을 수도 있다는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웃고 있는 메피스토텔레스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매피스토텔레스의 친구나 사촌이라서 그럴까.

최근 한 교회의 기사를 보았다. “부자 세습 실패하자 은퇴 예우금 8억 5000만 원 요구한 목사 '사재 털어 교회 세웠으니 응당 보답하는 게 상례'”라는 제목의 기사다.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주인공 목사는 “통상적으로 목사가 사재를 털어 교회를 개척했으면, 교회가 부흥한 후 반환해 주는 게 상례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 교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 교회는 장사요 사업이었다. 성공했으니 성공보상금을 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바쳤지만 이익이 생기니 생각이 달라졌다. 결국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목사의 투자처임이 드러났다.

이것은 그 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세습을 완료했다. 농촌의 교회들도 소리 소문 없이 세습을 마쳤다. 세습 자체는 사실 아무런 문제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습의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위 목사의 예에서 보듯이 교회가 개인의 사업이요 투자라는 사실을 상례로 인정하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럴 일은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出家이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거기에는 재산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의 재산 출연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업이며 투자이다. 아니 투기이다.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충족을 목표로 세운다. 병 낫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메피스토펠레스를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아무리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해보라.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이 분명한 사실을 어리석은 인간들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성서는 인간을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말한다.

죽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과연 자신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는가를 면밀히 살펴보라. 자신이 그리스도 때문에 낮아졌는가, 작아졌는가, 어린 아이와 같이 늘 묻고 배우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라.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가도 돌아보라.

그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장례식을 ‘천국환송잔치’로 명명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솔직해진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가식을 부릴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려움에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는 낮아진 것이 아니다. 작아진 것도 아니다. 죽음 전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자신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개신교는 태생부터 잘못되었다. 교회는 목사가 차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제자들의 사회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그런 교회의 특징은 교인들을 따라 한사코 낮아지려는 것이며 작아지려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가 어떻게 커질 수 있는가. 교회가 어떻게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곳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샬롬은 인간의 욕망 너머에 있다.

그런 교회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결코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릴 수 없다.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고 작아지려는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혼자서는 혹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유혹에 넘어가는 자매와 형제들을 버려두지 않는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던가.

지금이 바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설 때이다.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인식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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