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
부활의 삶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4.0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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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고 더럽다.”

그동안 서울과 부산시장을 뽑는 선거운동을 보며 든 생각이다. 새삼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라는 시조의 한 구절이 실감나는 계절이다.

물론 나는 이번 선거 말고도 꽤 많은 선거들을 보아왔다. 사회가 과거보다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성숙한 사회로의 진일보라기보다는 노골적인 의사표현의 자유가 되었다. 의사표현이 자유로워진 만큼 우리 사회는 잔인해지고 지독해졌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분노로 넘치지 않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무슨 말이든 서슴지 않는가.

야당의 대표는 아니지만 수장격인 비대위원장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분노하라는 것이 아닌가. 선거를 분노로 선택하는가. 정권 심판은 국민이 알아서 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분노를 촉구한다면 선거가 지난 후에도 그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노가 우리 사회 변혁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분노가 순화되지 않고 그대로 작동하는 사회가 된다면 결국 돈이 힘인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 우리 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 새로운 계급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출마한 정치가들뿐만이 아니다. 현역 정치가들만도 아니다. 정치에 관해 거드는 정치평론가들을 보라. 그 중 진모씨를 생각해보라.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창의적이면서도 삐뚤어질 수 있는가. 그 좋은 머리로 어떻게 그런 지독한 말들을 쏟아내는가. 그런 게 미학의 극치인가. 참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런 인생은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런 인생이 아닌가. 나는 그 사람이 애초부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정치판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야당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번 정부와 대통령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결국 자신만 옳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동안 잘못된 정부에 속해있던 원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무지 표리부동하다. 의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그 사람은 모른다.

기억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야당 후보는 물론 더 심각하다. 특히 용산 참사의 잘못을 아직도, 아니 중차대한 선거 국면에서도 “과도한 그리고 부주의한 폭력행위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력 투입으로부터 생겼던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런 사람이 다시 서울시장이 되면 서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공안정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더구나 기억 앞에 겸손해야 한다면서 거짓말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합리화하는 이 머리 좋은 인간을 서울의 시장으로 선택할 수 있는가. 서울을 다시 개발을 빙자한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도록 놔둘 수 있는가. 결국 그 이익의 수혜자가 누구인가. 그로 인한 빈부격차는 어찌 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선거판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비겁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세상이 이처럼 비겁하고 더러운 것은 당연하다. 이런 세상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기사가 있다. 가룟 유다의 기사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직무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불의한 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습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자기들의 말로 아겔다마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피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의 거처가 폐허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은 유다가 산 땅을 ‘아겔다마’라고 하였다. ‘피의 땅’이라는 뜻이다. 용산 참사를 생각해보라.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가. 그 땅을 유다가 어떻게 샀는가. ‘불의한 삯’이다. 예수를 판 돈으로 그는 그 땅을 샀다. 그는 그 땅에서 죽었다. 창자가 터져 나와 그 땅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것은 오늘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땅을 살 수 있는 돈은 사실 ‘불의한 삯’이다. 초기 교부들은 그것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지적했다. 부자들의 부는 가난한 자들의 것을 도둑질 한 것이며 상속은 그 도둑질을 대물림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나 오늘날 부자들을 향해 그렇게 설교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오히려 돈 가진 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돈을 단 꿀처럼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되었다.

교부들의 시대는 교회의 근본적인 타락과 변질이 이미 시작된 시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래도 초기교회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복음에 대한 이해 역시 남아 있었다. 교부들의 외침은 교회 안에서의 마지막 외침이 되었고 이제는 그런 메시지가 더 이상 선포되지 않는다. 그런 외침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더구나 세상의 소음은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만큼 사람들의 욕망은 커졌고 양보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교회가 생기기 전 그곳에 모였던 이들은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 맛디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뽑았는가. 제비를 뽑게 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제비뽑기의 의미를 완전 망각했다. 왜 그들이 제비뽑기를 했는가. 그것은 맛디아와 요셉이 자신이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서로 상대방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용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말한 황금률과 사마리아인의 이웃에 대한 교훈과 같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실천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먼저 헤아려 상대방에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가장 끝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제비뽑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요셉과 맛디아는 서로 안 하려고 도망을 가다 붙잡힌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 이런 전통이 이어져 살아있다면 오늘날 선거가 오늘날처럼 비겁하고 더러울 수 있었겠는가. 완전히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리스도교 선거가 세상의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그래서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활의 아침이다. 나는 이 거룩하고 기쁜 부활의 아침에 선거 이야기를 주제로 글을 썼다. 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힘을 얻어 새로운 부활의 삶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달라졌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줄행랑을 쳤던 그들이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 삶의 방식 역시 달라졌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예수님처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발을 씻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이 살게 된 부활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용납할 수 없는 삶이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처럼 십자가에 달렸다. 죽음의 방식은 다양했지만 그것이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다는 점에서는 십자가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장렬하게 복음으로 산화되었다.

부활을 축하한다는 것은 나도 당신도 부활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피의 땅인 세상에서 한 평의 땅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불의한 삯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정녕 부활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겠다. 유다의 삶을 살겠는가. 아니면 열두 제자의 삶을 살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부활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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