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식사
공동의 식사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4.28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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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오기 전 나는 두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 교회는 교사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다른 한 교회는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방문해서 설교도 아니고 강의도 아닌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의도적으로 두 곳 모두에 빵을 만들어 갔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목사가 집회를 하기 위해 오면서 빵을 그것도 직접 만들어가지고 온 경우를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마든지 더 보기 좋고 맛있는 빵이 있다. 그런데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일을 한 것은 일종의 관습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다른 모든 종교 역시 이점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만 달린 사람들이 되었다. 특히 개신교는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배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냥 눈물 한 방울이면 족하다. 그래서 교회 주차장에서 교인들이 서로 먼저 가려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물지 않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은혜가 교회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상이다. 그래서 얼마 전 장신대에서 조사한 설문조사를 보면 교회가 국회보다도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통계 결과가 나왔다. 오늘날 국회가 어떤 곳이 되었나를 우리는 잘 안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달라진다. 빠루를 들고 있는 나경원님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훌륭한 점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국회는 오늘날 패싸움 하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런 국회보다 더 신뢰성이 떨어지는 곳이 되었다. 물론 교회도 싸움 하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싸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그러니 국회보다도 더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 교회를 바라보면 그러한 결과 공표는 오히려 늦은 감마저 느껴진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는 공들여 그런 씨앗들을 심어왔다. 썩은 음식이 있는 곳에 파리가 몰려든다. 단내만 나도 초파리가 들끓게 된다. 교회는 썩은 음식과 단내 나는 곳이 되었다. 무엇이 썩은 음식이고 무엇이 단내 나는 것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내가 빵을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방문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빵이 가지는 상징성을 교회 안에 되살리자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주님이 본을 보이셨다. 주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의 빵보다 먼저 그냥 빵을 먹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연출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본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해야 할 말들을 밀어놓고 생선과 빵을 구워 제자들의 조반을 준비하셨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도 식사를 한 후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기사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일단 먹어야 주님이 보인다. 들어야 할 말도 들을 수 있다. 

인간에게 빵이란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삶의 요소이다. 일상이라는 말은 그것을 다 담아낼 수 없다. 하지만 빵이란 일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주도면밀하게 먹을 것을 준비하신 것은 결코 우연하거나 특별한 일로 치부할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성찬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자는 것이다. 아니 성찬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공동의 식사(잔치)였다. 그리고 초기교회는 그것을 재현했다. 성찬이다. 그러니까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의 식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의식이 되었다. 그래서 성찬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의 식사가 아니라 예배의식으로 따로 구분되었다. 나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결정적인 패착 가운데 하나라는 지적을 해왔다. 성속분리의 원인 중 으뜸이 되지 않는가.

나는 목사다. 그래서 사람들과 식사를 하게 되면 식사기도를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나는 각자 기도할 것을 권한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로 대표 식사기도를 고집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이런 기도를 드린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음식을 먹고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하소서.”

아마 이 기도를 듣는 분들은 내가 ‘오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성찬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공동의 식사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현저한 예표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정성을 다한 음식으로 함께 먹고 마시게 된다. 그것이 잔치가 아닌가.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평등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영웅이나 엘리트가 없다. 모두가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 평등을 상징하는 가장 확실한 실천이 똑같은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똑같은 음식인 만나를 사십 년이나 먹어야 했다. 일 인 당 정확히 한 오멜씩!

이런 내 생각과 실천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책이 나왔다. 실천신학자 윌리엄 윌리몬의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비아)다.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빵과 평범한 포도주,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는 모두 주님을 만나는 길이 됩니다(21쪽)."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이유는 물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수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신뢰를 잃은 것이고 교회 역시 사회의 신망을 상실한 것이다. 

"성찬이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주일마다 거룩한 말을 빌려 꾸지람을 듣는 자리, 우리가 얼마나 불의하고 부정하며 불성실한지를 끝없이 되뇌는 행사로 퇴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가 없는 식탁 교제는 이 세계의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은 채 환상 속에서 경솔하게 웃으며 무감각하게 '웃으세요.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답니다'는 말을 뱉으며 자위하는 행사로 전락하고 맙니다. 설교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해 주며, 성찬은 '이미 임한, 아직 오지 않는' 주님 나라의 비전을 향해 우리가 눈을 뜨게 해 줍니다." (200쪽)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의 식사가 성찬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실천해왔다. 사람들은 그것이 작은 교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맞다. 올바른 지적이다. 교회는 공동의 식사를 나누지 못할 정도로 커지면 안 된다. 공동의 식사는 단순히 같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의 식사는 교제이며 나눔이다. ‘코이노니아’의 기반은 공동의 식사이다. 공동의 식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교제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한다. 

나는 좋은 목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요리를 배우고 그 요리를 나눈다. 나는 새로운 교회에서 반드시 주방에서 일하는 목사가 될 것이다. 질서 있게 요리하고 가능한 많은 분들에게 대접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각자 잘 하는 음식으로 서로를 섬기는 교회가 될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교회가 될 것이다. 때론 좀 취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은 설교가 해결해야 할 몫이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제 우리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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