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진석 추기경 선종, 다른 의미에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
고 정진석 추기경 선종, 다른 의미에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
  • 지유석
  • 승인 2021.04.29 09: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회 부유해졌지만 4대강 등 국가폭력엔 ‘침묵’, 문 대통령 애도 표하기도
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한국시간 27일 선종했다.  ⓒ 천주교서울대교구 제공
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한국시간 27일 선종했다. ⓒ 천주교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27일(한국시간) 선종했다. 고 정 추기경의 부고는 다른 의미에서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본다. 

고 정 추기경은 1998년 고 김수환 추기경 후임으로 가톨릭 서울대교구장 주교를 맡았다. 고 정 추기경은 재정 운영에 탁월한 감각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사저널> 2006년 2월 24일자 기사는 고 정 추기경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정 추기경은 교회 살림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서울 강남의 하이닉스 반도체 사옥을 사서 세를 주고 강남 성모병원을 새로 짓고 있다. '미사예물공유제도'라는 서울교구만 시행하는 독특한 제도도 그가 만들었다. 이 제도 덕에 부실했던 서울 교구가 윤택해졌다."

서울 교구가 '돈맛'에 취했을까? 고 정 추기경 재임 시절 명동성당 주변도 무척 호화스러워졌다. 이 지점에서 명동성당의 지난 날을 복기해 보아야 한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명동성당, 그리고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아래 회관)은 시위대의 피난처였다. 

당시 거리는 민주화를 외치며 공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는 학생, 시민들과 최루탄으로 맞선 공권력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른바 '백골단'으로 불린 진압경찰은 학생, 시민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학생, 시민들은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명동성당과 회관으로 몸을 숨겼다. 

명동성당 사제들과 회관 목회자들은 공권력의 진입을 막았고, 시민 집회와 안전한 귀가를 책임졌다. 말하자면 '헤로데의 권세'에서 도피성 구실을 한 셈이다. 

특히 명동성당 들머리는 시국이 요동칠 때마다 사제, 시민들이 모여 시국 미사를 드렸다. 명동성당 들머리는 그야말로 역사적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지난날의 역사는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2010년 5월 31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집전한 4대강 사업 반대 시국미사를 끝으로 더 이상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는 열리지 않았다. 이후 대대적인 재개발이 시작됐고, 명동성당 들머리는 옛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다 고 정진석 추기경 재임 시절 벌어진 일들이었다. 

‘돈’에 밝았고 보수언론 탐독했던 추기경 

2010년 5월 31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집전한 4대강 사업 반대 시국미사. 이 시국미사를 끝으로 더 이상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는 열리지 않았다. 사진 맨 왼쪽에 문규현 신부의 모습도 보인다. ⓒ 사진 = 지유석 기자
2010년 5월 31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집전한 4대강 사업 반대 시국미사. 이 시국미사를 끝으로 더 이상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는 열리지 않았다. 사진 맨 왼쪽에 문규현 신부의 모습도 보인다. ⓒ 사진 = 지유석 기자

고 정 추기경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앞서 인용한 <시사저널>은 고 정 추기경이 "텔레비전을 일절 보지 않는다. 대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열독한다고 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보수성향은 왜곡된 역사를 만들었다. 1980년 고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붙잡혀 청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고 김 전 대통령 가족은 봉성체, 즉 병자나 감옥에 계신 분에게 사제가 찾아가서 기도하고 성체를 모셔주는 가톨릭 예식을 청했지만 당시 청주교구장은 이를 거절했다. 당시 청주교구장이 바로 고 정진석 추기경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그가 추기경으로 재임하던 시절은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과 시기가 겹친다. 그리고 이 시기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밀양 송전탑 건설, 제주 강정 해군기지, 세월호 참사 등 국가권력과 얽힌 부조리가 잇달았다. 이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아래 정의구현사제단) 사제와 수녀들은 현장에 뛰어들어 약자의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하지만 공권력은 개의치 않았다. 경찰이 성체를 훼손하는가 하면 수녀들의 머리채를 잡은 일도 벌어졌다. 

이에 대해 고 정 추기경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정의구현사제단이 사퇴 촉구 시국미사를 벌이자 보수언론인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엉뚱한 일’, ‘거짓 예언자의 욕심’ 운운하며 비난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누구든 약한 존재일 수밖엔 없다. 전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종도 한동안 과거 군사정권에 부역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삿된 권력인 헤로데와 로마 제국에 맞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곁을 지킨 점을 감안해 볼 때 고 정 추기경의 행적엔 의문부호를 찍을 수밖엔 없다. 

고 정 추기경은 세상을 떠났다. 부디 고이 잠 드시기를 기원한다. 그가 가톨릭교회와 세속의 역사에 남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은 남은 자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고 정 추기경의 장례미사는 오는 5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주교로 서품되신 후, 한평생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평화를 주신 추기경님의 선종이 너무나 안타깝다"며 고인을 애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