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비결’
‘행복의 비결’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4.2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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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딸의 집에 가서 손자를 돌보았다. 많이 컸다. 눈에 총기가 서렸다. 이제 뭐가 좀 보이는 모양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다. 아이의 눈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백일이 지나면서 사물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만큼 아이가 관심을 갖는 모습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아이가 처음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냥 방긋방긋 웃는 것이 아니라 흐흐흐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직 깔깔거리는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것을 딸 내외가 동영상으로 찍어놓았다. 정말 신기하다. 

아이를 보는 일은 분명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가 너무 예쁘고 신기해서 그것을 잊게 만든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더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행복의 정체를 밝히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출처가 생각나는가. 맞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행복 비결’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서 비장하게 결의를 다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은 물론 모든 재능과 소유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런데 앞 문장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뒤 문장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약속이자 예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충성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먼저 그것을 구하는 삶을 살 때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이 약속대로 주어진다. 

오늘날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목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이중직 혹은 자비량목회가 앞으로의 목회의 대세라고 말한다. 그렇게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번 목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직접 돈을 벌어보니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겠다는 말과 함께 이제야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뭐, 중요한 깨달음이다.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목회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목사님들이 직업전선, 아니 돈 버는 일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뛰어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돈 버는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애초에 그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분들이 정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뛰어들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이 모든 일’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다. 그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기다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었다면 굶어 죽어야 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책임지는 일도 ‘이 모든 것’에 속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같은 인간의 필요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나는 돈 버는 일에 뛰어들어 이중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무상통하는 성령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가다가 패가망신 하여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없이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내가 가족들에게 느꼈던 미안함과 책임감을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을 책임지는 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생명도 어떤 일을 하려는 각오도 다 주님에게 바친 상태였다. 이미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되었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택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이며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룰 구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먼저 나는 노숙자가 되지 않았다. 아내와 딸들 역시 힘든 시간을 지나야 했지만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잘 견뎠다. 특히 두 딸은 두드러지게 주님의 보호를 받았다. 딸들의 이야기를 지금 하지 않는 것은 자랑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어쨌든 잘 되었다. 지금까지의 돌보심도 감사하지만 나는 이제 딸들의 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돈 버는 일에 뛰어들거나 내 개인의 역량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내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다. 내가 할 일, 아니 우리가 할 일은 계속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아내는 돈 안 버는 가장인 나를 대신하여 이 일 저 일을 닥치는 대로 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 일도 아내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아내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올인’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선택의 몫은 아내의 것이다. 아내도 지나온 십 수 년 동안 주님이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는 못한다. 아내가 더 행복해지려면 이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면 된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것이 더 낫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낫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백일 된 손자 녀석이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주님의 이 약속을 떠올렸다. 내가 어제 느꼈던 행복은 정말 완벽한 행복이었다. 그 행복이 공짜다. 나는 더 행복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 더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돈 버는 일에 뛰어드는 목사님들과 이중직이나 자비량목회가 앞으로의 목회의 대세라고 말하는 분들에게,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수 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행복 비결’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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