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끝 자리
맨 끝 자리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4.30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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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최고란 말이 싫어. 최고 말고 최중. 다 같이 살면 안 되나"

윤여정님이 기자회견 중에 한 말이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녀는 지금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그녀는 항상 최고의 배우는 아니었다. 여배우의 경우는 사실상 미모가 그것을 결정한다. 그녀의 미모는 최고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최중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그녀의 최중이 최고의 순간을 연출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최중을 배반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그녀는 항상 최고가 되려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개런티를 받는 최고의 배우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녀의 진짜 속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최고가 아닌 사람의 심정을 오래도록 경험했다. 그래서 최고의 자리에서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자신이 추구해왔던 최중을 말하면서 다 같이 살 수 있는 최중이 최고보다 더 값진 길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다. 

멋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는 최고의 자리에서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런 걸 사람들은 내공이라고 한다. 그녀의 내공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인생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 같이 사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최고가 아니라 최중을 목표로 삼는 이들만 있어도 세상은 훈훈해진다. 최고가 가지는 가장 큰 함정은 자선이다. 많은 톱스타들이 기부를 한다. 그 사람 개인으로서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톱스타들은 자선이 자신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언론은 그런 기사를 대서특필한다. 큰 금액이지만 광고비용으로는 그다지 과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스타들의 자선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스타들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기부 역시 동일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인 시각, 혹은 상식으로 바라보면 대단한 일이다. 존경받을 만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서의 관점으로 보면 애초부터 그런 기부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회,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잠시 후에 이 이야기는 다시 하기로 하자. 

윤여정님 이전에도 최고가 아니라 최중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홍콩 배우 주윤발님이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 8,096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일부도 아니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 이유는 그가 한 말에서 드러난다. 

“내 꿈은 행복해지는 것이고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의 꿈은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의 비결임을 그는 안다. 주윤발이 말하는 보통 사람이 윤여정이 말하는 최중이 아닐까. 모르겠다. 윤여정의 심정에는 중용이라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스타인 이 두사람은 다른 스타들과 달리 최고가 아니라 중간점을 지향한다.

주윤발님은 그것을 자신의 일상에서 실천한다. 그는 17년간을 폴더폰을 사용하다 최근에야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다. 한 번 생각을 해보라. 일조에 가까운 재산을 가진 사람이 촐더폰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더구나 배우이면서도 주윤발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할인매장에서 옷을 구입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면 된다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도 했다.

사실 보통 사람도 이것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친구가 입은 헐렁헐렁한 양복바지를 보고 왜정시대 사람 같다는 말을 했다. 친구는 수십 년 된 옷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고 다닌다. 나는 그런 친구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딸들이 선물로 사준 옷들을 입다보니 유행이 지난 옛날 옷들을 입지 않게 되었다. 

사실 나는 절대로 옷을 사지 않는다. 장기려님의 책을 본 이후에는 나도 두 벌의 양복만으로 평생을 지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큰 딸이 귀국독주회를 하면서 내게 양복 한 벌을 사주었다. 아무리 반대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딸을 위해 양복을 샀다. 그 아이의 결혼식 때 다른 양복을 하나 더 샀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 나도 모르게 이전의 양복들은 더 이상 입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철학이나 가치관에 따라 산다는 것이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딸의 주장에 내 고집을 꺾은 것을 자유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틈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친구가 입은 철 지난 구식 옷을 보고 왜정시대를 운운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실감나는 말씀 한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내가 넘어진 것이다. 내가 넘어진 것은 내가 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명이 필요 없다. 불식간에 넘어지는 일이 또 내게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경계하는 마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필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앞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주할 때마다 조율해야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와 같다.

윤여정과 주윤발은 최중과 보통 사람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최하를 목표로 삼는 내가 그들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새삼 윤여정과 주윤발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들을 보고 힘을 얻는다. 적어도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촬영하는 곳에서는 다 같이 살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소외된 사람이 없이, 높낮이 없이 다 같이 사는 곳이 될 것이다. 목표를 최하가 아니라 최중을 삼아도 그렇게 된다. 

주윤발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종교는 불교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존경하는 사람들은 마음공부를 하는 불교신자들이었다. 분명 주윤발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그 다음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얌체는 아니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특징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얌체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가장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만든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윤여정과 주윤발 두 사람은 이 말씀을 실감나게 해준다. 중간에만 앉아도 달라진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얌체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최고를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높이 솟은 교회의 종탑을 볼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찌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십자가도 짐승들의 영역표시처럼 보인다. 나는 정말 불손한 그리스도인인가보다.

나는 윤여정과 주윤발이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중간지점만을 바라보았는데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으로도 그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맨 끝 자리를 향해 내려간다. 예수님도,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 나라도 맨 끝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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