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일과 하나님 나라
교회의 일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5.09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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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도할 곳을 찾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이혼을 한 분이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곳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교회를 찾은 이유는 그래도 교회가 가장 건전한 기도처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아는 존재이다. 그래서 기도를 드린다. 대상이 누구건 상관없다. 때론 바위와 큰 나무일 수도 있고, 때론 사자나 곰이나 악어와 같이 강한 동물일 수도 있다. 이른바 토템(애니미즘)이다. 토템 신앙은 인류 문화의 한 부분이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고등중교이다. 그렇다면 고등종교가 하등종교보다 우월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나는 한 영화를 보았다. 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위안부를 다룬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보며 목사인 나는 무당(샤마니즘)이 그리스도교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무당이 상처 입은 영혼을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상처 입은 영혼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히는 종교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교로 인해 망가지는가. 그것이 이단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지 말라. 정통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악행도 이단들이 행하는 것에 못지않다.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왜곡하거나 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황제가 교회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해방의 주역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장악한 최초의 황제이다. 신앙의 자유를 빌미로 교회를 로마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교회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우리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가 된 교회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아무리 찬양해도 그것을 통제하는 이가 있다. 황제다. 황제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즉각 중단된다.

성가대 지휘자이자 신학생이던 시절, 나는 성가대원들과 친해졌다. 성가대원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이 많아졌다.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식사도 생겨났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던 방식을 소개했다. 기왕이면 회식을 고아원에 가서 하자는 권유를 하였다. 일전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회식비용에 조금만 더 더하면 고아원의 모든 식구들과 함께 불고기 파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자는 나의 제안을 듣고 한 권사님이 조심스럽게 충고를 해주었다. 우리가 고아원에 가서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해 목사님의 허락을 얻었냐는 것이다. 만일 허락을 받지 못했다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권사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우리들의 사생활을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도,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일인데 그것을 목사님이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목사는 교인들을 그렇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고아원에 가서 회식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았다. 왜 목사님은 성도들이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일을 싫어하는 것일까. 어렵지 않았다. 성도들이 그런 곳에 돈을 쓰기 시작하면 교회의 헌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일종의 느슨한 감옥이었다.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를 통제하고 있는 복음의 감옥이었다. 이것이 교회의 실체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교회가 그런 곳이 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황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 있었다. 세상의 하부구조로 전락한 것이다. 교회에서 복음이 왜곡되고 오히려 반복음적인 일들이 관습과 전통으로 자리매김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결국 교회 자체가 자기 교회라는 욕망덩어리가 된 것이다.

교회가 욕망덩어리가 된 것이 기도하기에는 좋은 곳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복음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어떤 기도를 드리겠는가. 자기와 자기 자녀들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결국 욕망의 기도일 뿐이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인간의 필요는 주님이 더해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래서 우리가 욕망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주신다. 그것이 샬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것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바로 이 샬롬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먼저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곳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점점 더 욕망덩어리들이 되고 자신의 성취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체이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 자매가 기도할 곳을 찾아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다른 분으로부터 중보기도라는 것에 대해 듣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중보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내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위를 얻게 해주세요.!!”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 욕망덩어리가 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기도를 면밀히 돌아보라. 자신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있는가를, 그것도 먼저 구하고 있는가를 성찰해보라.

이 자매보다 진일보한 중보기도가 없지는 않다. 이른바 교체욕망이다. 세습을 금지하자 교체세습이 이루어진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면 중보기도가 되지 않는가. 그야말로 자가당착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다. 그래서 교회는 고아들과 같이 작은 자들을 도울 수 없도록 막는 이상한 곳이 되었다.

교회의 일, 특히 자기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말라. 오늘날 교회는 욕망덩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섬기는 곳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선전의 수단으로 삼는 곳이 되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정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종탑이 그처럼 높고, 저마다 높은 위용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대성당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바벨탑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말씀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이 더해 주시는 샬롬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정신을 차리자. 오늘날 교회와 선교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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