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헌금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5.1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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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금을 보내드리는 선교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최소 일 년에 한 번은 통화를 한다. 먼저 안부를 묻는 이야기가 오갔다. 본론이 나올 때가 되었다. 본론은 이제 후원금을 그만 보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에 따라 금액이 약간 변동이 있었지만 대략 십오 년 정도 되었다. 선교사가 후원금을 보내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어느 선교사나 후원금이 모자라기 마련이다. 새로이 후원금을 받기는 어렵지만 후원금이 끊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데 나에게 후원금을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매우 조심스럽지만 선교사님은 여러 번 내게 이제 그만 후원금을 보내시라는 말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후원금을 그만 보내라는 요구가 아니라 후원금 대신 내가 책에 대해 잘 아니 자기에게 필요한 책을 사서 부쳐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분도 내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분과 함께 농촌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에게 책을 사서 보내드린 적도 있었다. 필립 얀시의 책이 유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분이 선교사로 떠나기 전 같은 교회에 근무하던 우리는 그 일을 열심히 했다. 십여 권의 책들을 사서 농촌이나 오지에 사시는 목회자들에게 보내드렸다.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분이 나에게 후원금을 받는 것을 매우 불편해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분은 내게 여러 번 내가 선교사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내게 후원금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가난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우리는 오히려 선교사님보다 더 열악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열악한 삶이 후원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이다. 우리가 만일 그 후원금마저 보내지 못하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존재 의미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후원금을 보내는 것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명을 해드렸다. 가족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따로 헌금 시간을 갖지 않는다. 대신 우리 교회가 후원하던 후원금을 계속 보내드리는 것으로 헌금을 대신한다. 그러니까 후원금은 우리의 헌금이다. 내 설명을 듣고 선교사님은 이번에도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였다. 혹 떼려다 오히려 혹을 붙인 형국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후원금은 그분에게 계속 보내질 것이다. 

사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분들이 헌금을 드릴 곳이 필요하다. 교회를 떠난 분들은 헌금에 익숙해져 있다. 교회에 드려야 헌금이라는 의식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헌금으로 드릴 돈으로 다른 일을 하면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사실 자신이 직접 세상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섬기는 일도 막상 실천을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실제로 그런 일을 해도 헌금을 드렸을 때처럼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물론 십일조 논쟁 등을 통해 헌금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 논리에 반대한다. 헌금은 돈을 미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길이다. 헌금이 돈 놓고 돈 먹기가 된 것은 교회의 타락 탓이지 헌금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다. 헌금은 목사 개인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 없다. 그렇다고 헌금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헌금이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헌금은 단순히 목사와 목회자들의 생활비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만 눈을 돌릴 수 있어도 헌금의 사용처는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가서 너희도 이같이 하라'(가서 이웃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시작하면 헌금이 교회 안에 쌓이는 현상은 있을 수가 없다. 특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헌금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헌금은 그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동력이 된다.

목사들이 그 헌금의 대부분을 가져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헌금 유용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생각은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지 헌금을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개인들이 그 헌금으로 직접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돕거나 가서 이웃이 되는 일에 사용했을 때 부득불 감염될 수밖에 없는 ‘자기 의’라는 치명적인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백신이 될 수 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누구건 어느 정도 나르시스트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장 먼저 감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것을 안다면 교회에 드리는 헌금이야말로 가장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인 돈을 미워하는 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미워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금이 줄어들고 교회에 필요한 돈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돈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지 돈에 따라 교회의 필요를 확장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 예배당을 짓고 교육관을 짓고 수양관을 짓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보라. 결국 그것은 교회가 우상이 되는 첩경이다. 우상이 된 교회는 ‘돈 먹는 하마’가 된다. 그리고 오늘날 그처럼 우상이 되지 않은 교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헌금 없는 교회가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악순환의 한 국면이다. 헌금 없는 교회는 결코 교회 개혁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잘못된 것은 목사와 교회이지 헌금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헌금은 더 많이 드려져야 한다. 작금의 사회를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는가. 그 위기가 바로 ‘강도 만난 사람’들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강도 만난 사람의 형국이 되지 않았는가. 그 일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뛰어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개혁을 넘어 교회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사명이다.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상관이 없다.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한 것은 사마리아인이 아닌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관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조건이라는 말이다. 누구건 강도 만난 사람을 위기에서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교회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갇히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제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이다. 이 명제의 대우를 생각해보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가 아닌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다. 결국 헌금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의 미래는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오늘날 잘못된 목사들과 교회로 인해 더 큰 우를 범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케도니아 성도들처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헌금을 드려야 한다. 가난하면 금식을 해서라도 헌금을 드려야 한다. 헌금은,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길은 돈을 미워하는 것이며, 돈을 미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이다.

휴면 중인데도 우리 교회에 헌금을 보내오는 분들이 있다. 물론 그분들은 내가 그 돈을 개인적으로 다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의 양심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선교사들에게 후원금도 보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도 그 돈을 사용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돈 한 푼 없이 자기 나라로 쫓겨나야 하는 미등록 이주민을 돕기도 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나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어야(넉 달이 지나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도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텃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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