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사람
보고싶은 사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5.19 0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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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곽선희 목사님의 이야기다. 그분은 벤틀리라는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셨다. 그런 고급차를 타고 다녀도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분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교회 장로 가운데 외제차를 수입하는 장로님이 있는데 그 장로님이 그 차를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그 장로님은 자신이 목사님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걸려서 그 차를 꼭 타고 다니셔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곽 목사님은 할 수 없이 그 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면서 우리 교회 교인들이 당신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고 사나운 표정으로 말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영상을 보았다.

곽선희 목사님이라면 적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목사님이다. 그분의 설교는 늘 새로운 자료로 넘쳤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나는 곽 목사님을 중학교 때 만났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가장 가까운 교회가 인천제일장로교회였고 나는 하숙을 하면서 집에 오지 않는 날은 그 교회 대예배를 참석했다. 곽 목사님의 설교가 좋았다. 나는 그때 내 인생을 설계했고 그 설계와 똑같지는 않지만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집과 재산을 마련한 후에 목사가 되었다. 그분은 나의 인생을 설계하게 해주신 고마운 분이다. 그래서 숭의여전에서 목회를 하실 때도 그곳을 가보았고 압구정동에서 소망교회를 시작하셨을 때도 관심을 가지고 그곳을 지켜보았다.

그분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분이 예전에 내가 알던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분은 위의 벤틀리 사건에서 보듯이 변질되었다. 내가 알던 곽선희 목사님이라면 장로님이 선물한 벤틀리를 받은 다음 날 팔아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지도 않았고 자신의 아들에게 거대한 교회를 지어 그것을 주고 그 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이후의 그분의 설교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분의 설교는 들을 필요가 없다.

유학을 떠나기 전 그분은 정말 좋은 목사님이셨다. 나는 중학생이던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그분의 두 손에서 전해오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의 손길에는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라는 무언의 격려가 담겨 있었고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목사님이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 특히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대답을 하던 그분의 표정은 그분의 달라진 모습을 너무도 분명하게 확인해주었다. 그토록 온유하셨던 분이 어떻게 그렇게 사나워질 수 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분의 유학과 성공이 그분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건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이라고 너무도 굳건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학을 가서 학위를 따고 교회가 성장하여 대형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까.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그것은 사단의 올무이다, 학위는 신학교 교수가 되려는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필요하다. 목회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학위는 ‘주님의 양들’을 섬길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섬김이란 상대방의 발 아래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목사만 되어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박사 목사가 되면 그 가능성은 제로가 된다. 결국 본을 보이는 목사가 아니라 입으로만 가르치는 목사가 될 수밖에 없다. 섬김은 사라지고 임의로 하는 지배와 다스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 교회는 결코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수 없는 곳이 된다. 엄격한 하이어라키로 이루어진 조직이 됨으로써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 칠한 무덤’과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회 칠한 무덤'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가. 위선이라고 답하지 말라. 결국 위선이 생명을 말살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하고 죽음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유대교를 생명 없는 종교를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 역시 그리스도교를 생명 없는 종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그 대답을 세례 요한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사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기사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고 자신은 쇠하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높인다면서 자신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생각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세베대의 아내의 마음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인간이라면 누구건 이 생각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사를 읽을 때 분노하게 된다. 그런 요구를 하는 세베대의 아내와 그 말을 듣고 분노하는 제자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요구가 자신의 요구가 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어리석다는 생각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흥하는 일과 자신이 쇠하는 일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도 흥하고 자신도 흥하려는 마음이 이스라엘의 산당이며 그것을 하나님은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 특히 요한 공동체는 세례 요한의 기사를 그토록 장황하게 수록하고 세례 요한의 길을 따랐던 것이다.

단순하게 성공을 피하고 성공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 일을 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 나라는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교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서의 요구처럼 그리스도를 높이는 분명한 실천사항이 주어진다. 자신이 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망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동안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떠나갔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 이 일을 감내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것을 상상하기가 어렵다면 자신의 교회에서 가장 신실한 교인이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다른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래서 당신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그 일을 기뻐할 수 있는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자신이 망하는 것이다.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만 매진해왔다. 그러나 그와 똑같이 중요한, 자신이 망해야 하는 것을 등한시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무의미해졌다.

당신은 그리스도 때문에 망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로 그것을 행했다. 오늘날은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일로 그리스도인들이 망해야 하는가. 그것은 각 사람의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일을 행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순교와 비슷하거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곽선희 목사님은 우리에게 세례 요한의 길의 반면교사 역할을 하셨다. 그분의 역할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망하면 예수님이 흥하신다. 정말 그분을 높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망하는 길을 가야만 한다. 농담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망한 사람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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