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가
지금은 우리가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5.19 05: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래 전 호주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늦깎이 신학생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분은 내 글을 읽으며 많은 질문을 했다. 그분이 마침내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을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주도하는 곳에서 하는 일이 불의하다고 생각된다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안수비를 걷는다는 것이다. 안수하러 오는 목사들의 거마비를 지불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 목사후보생의 눈에는 그것이 성직매매와 같이 불의한 일로 비쳤던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아무 소리 말고 안수비를 내라고 했다. 그리고 목사가 된 후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는 목사가 되시라고 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여 그분은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는 목사님이 되었다. 그 이후의 소식을 나는 모른다. 더 이상 내 글을 읽지도 않고 내게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는 섭섭하지 않다. 어떤 곳에 있든지 그분이 신실한 목회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개신교 그리스도교는 중구난방이다. 그리고 수백인지 수천인지 모르는 각각의 교단에는 안수비와 같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불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비리들과 악한 관습들이 산재한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애초에 하나님 나라는 어떤 조직도 획책하지 않는다. 조직이 되면 생명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조직이 되면 조직원은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좀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조직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존재하려면 조직이 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는 조직이 아니라 생명(유기체)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려는 인간에게 그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심지어 불의하다고 여겨 교단을 떠나거나 쫓겨난 사람도 결국 기존의 조직에 대항하여 조직을 만들게 된다. 물론 그것을 연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대를 말하기 전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로서 조직을 선택하지 않고 생명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명의 순환에 참여하게 된다. 이 생명의 순환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연대이다. 물론 그것의 정체는 형제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와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연대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힘을 가지기 위한 연대이거나 필요에 의한 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연대는 지체로서의 소통이다 지체는 몸 전체의 필요를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몸 전체를 관할하는 머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다. 지체에는 공통의 디엔에이가 새겨질 뿐만 아니라 몸의 필요에 맞추어 그 형태와 종류가 결정된다. 줄기세포의 분화를 생각하면 이것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세포로 형성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포는 몸을 위해 존재하다. 생각보다 짧은 기간 후에 그것운 또 새 것으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연대의 가장 큰 특징은 짧은 순환이다. 그런데 그런 생명의 연대가 영속성을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암세포이다. 암세포는 다른 세포와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욕심껏 독점한다. 암세포는 번영한다. 그러나 그 암세포는 전체 몸과는 상관없는, 아니 전체 몸을 죽이는 몸 안의 적이 된다. 이런 암 세포가 바로 대형교회이다. 대형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죽이는 전체 몸과 상관없는 암 세포이다.

나는 오늘 아침 동성애자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신학교에서 제적 처분을 받거나 목사 안수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의 기사를 보았다.

안타깝다. 조금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유보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목사가 되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가 되면 그 이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바를 추구하는 목회를 할 수 있다. 오늘날 목사는 목회를 할 수 있는 일종의 라이센스이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준거를 요구한다. 옳은 일을 하려면 그것이 필요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동성애 지지만이 기존의 교회와 교단이 가지고 있는 불의가 아니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보다 더 악한 불의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려면 넓은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멀리 볼 수 있는 능력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 시선과 능력을 가지려면 현실만을 모든 것으로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불의의 타파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그보다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불의와 싸우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동성애자들에게 얼라이(이웃)가 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 광범위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우선순위를 내려놓을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궁극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먼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바라보았고 기다리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실 수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예수님의 본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동성애자 지지도 그런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실 때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기다림을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이야말로 참된 기도이자 예배이다. 이런 기다림 없이 무언가를 성취해보라. 그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가 된다.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다.

나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교단과 결별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를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제 어떤 일을 하실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나를 이끌어 오셨다. 나는 글을 쓰며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산 햇수만큼 오래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산 것 같지만 주님이 이끄시는 삶이었다는 것을 내 과거의 편린들이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온전히 드릴 때 나는 그 과정을 통해 빚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주심은 나를 부르실 것이다. 모세는 팔십에 그 부르심을 받았다. 늘 말하지만 그 나이는 죽기에 딱 알맞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사십 년을 더 일하게 하셨다. 팔십 년. 아버지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빚어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제적을 당한 신학생들과 목사 안수 시험에 떨어진 분들에게 기다리시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일에 함몰되지 말라고.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시간이 하나님이 자신을 빚어 만드시는 시간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지금은 교회의 해방이 절실한 시점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 부르심을 받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수할 때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옷깃을 여미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