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부르시는 주님
죽음으로 부르시는 주님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5.22 05: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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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들의 사면이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 뜻을 헤아려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국민의 뜻이란 게 어디 실체가 있는가. 또 국민이란 게 어디 하나로 뜻이 일치한 경우가 있는가. 결국 국민의 뜻이란 명분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실이나 핑계일 뿐이다. 책임회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어찌 보면 정치가 종교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김영삼님과 김대중님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했다. 정치가들에게는 원수가 없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현실로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입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원수를 만드는 달인이 되어버린 그리스도교보다 정치가 더 낫다.

그러나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다. 정말 정치가 종교보다 나은 것이 아니고, 정치만도 못한 정치판이 되어버린 그리스도교가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실상을 본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낙담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실상을 본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의 근거가 된다. 아니 반드시 실상을 파악해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며칠 전 내 글에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런데 그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도 눌러지지가 않았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곳이거나 내 기기가 고장이 난 것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컴으로 댓글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댓글을 달았다가 댓글의 내용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삭제한 것이다.

그 댓글은 그리스도 때문에 망한 사람을 보고 싶다는 내가 세례 요한 같다는 언급과 함께 목이 잘려 쟁반에 놓인 세례 요한의 얼굴이 생각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글을 쓰면서 사는 나에게 세례 요한과 같다는 말을 해주시는 분들은 많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쟁반에 담긴 얼굴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댓글을 읽고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 내가 세례 요한처럼 살다 목이 잘려 죽기를 원하는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광인 죽음이다. 그 순간 백일이 지난 손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마음이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상은 중요하다. 망설이는 나를 발견해야 나는 결연하게 내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댓글에 감사의 인사와 함께 내 각오를 다지는 댓글을 달려고 했던 것이다.

우연이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은 늘 이렇게 하신다. 나로 하여금 나를 돌아보게 하신다. 그리고 나의 속마음을 나에게 보여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내 속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아시는 내 속마음을 내게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 확인하게 하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결연한 의지를 다지게 하시는 것이다. 내 스스로 결정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처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은혜란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다. 아니 무서운 것이다. 결국 은혜란 어떤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를 미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부활의 관문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부활이 주어진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따 놓은 당상처럼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 죄수처럼 그렇게 구원 받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당시를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두 명의 사형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세 사람은 모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들은 지금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마귀가 그들의 눈알을 파먹을 것이다. 내장도 파먹을 것이다.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가. 더구나 인류는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한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그 죄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발견했다. 부활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분이라면 자신의 영혼을 의탁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졌고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의탁했다. 아무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아예 도망을 갔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순간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던 그 상황에서 그 사형수만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더 이상 그러한 상황은 주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상의 사형수와 같은 그런 기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최근 나는, 부임한 교회에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을 없앨 수가 없어 그것을 어떻게 가릴 것인가 고민하는 한 목사의 글을 읽었다. 교회와 무덤은 본래 하나이다. 마을의 중심에 교회가 있고, 교회 옆은 묘지였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나 회피의 대상이 아니었다. 반대로 죽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었고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회피하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나는 우리 교회 예배당이 생기면 그곳에 관을 두고 준비가 되면 그 관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우리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는 과정에 포함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어야 한다. 결국 죽음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서 죽음을 결정해야 한다. 어떠한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것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어야 한다.

나는 내 글을 읽는 분에게 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잘려진 머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일단 내 글은 성공했다. 이제 내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글이 아니라 나의 죽음이다. 나는 세례 요한처럼 죽어야 한다. 내 글의 내용처럼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

나는 이제까지 충분히 잘 살았다. 가난을 택한 것도 쫄딱 망한 것도 참 잘 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지만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더구나 최근 손자까지 보지 않았는가. 그건 정말 인생의 어떤 호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아직 작은 애의 결혼을 보지 못했지만 나는 인생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누렸다.

이제 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머리가 내 죽음이어야 한다는 주님의 메시지까지 받았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는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함을 알았다. 그의 삶이 내 삶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쇠하는 것인가. 이것이 내 마지막 삶의 화두가 될 것이다. 죽기 전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제자를 보내 물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옥에서 듣는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 말씀을 듣고 세례 요한은 그분이 오실 그분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 확신을 가진 그의 죽음은 자신의 말의 성취임과 동시에 가장 위대한 자로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는 세례 요한보다 작은이가 없다고 선언하셨다. 모두가 세례 요한과 같은 죽음을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자리는 없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때문에 기꺼이 죽으려는 자들의 나라이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는 정치판도 원수도 없을 것이다. 나를 그 죽음으로 부르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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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빈터 2021-05-29 21:40:08
정신이 확 든다
정신이 확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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