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맘몬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개와 맘몬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6.05 0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회 건축 꿈 이루려 헌금 3억 4000만 원 펀드 투자했다는 목사 "완전 잘못 넣어서 개 박살 났다"

모 언론에서 본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를 읽어볼 필요조차 없다. 또 다른 개가 한 마리 나온 것이다. 개 박살이 난 것이 아니라 개라서 박살이 난 것이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개 박살을 낸 목사를 한탄한다.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두 가지 잘못이 들어 있다. 우선 그런 개 같은 짓을 한 것이 목사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번 생각을 해보라. 물론 목사가 결정하고 한 짓이다. 그러나 목사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는가를 잘 생각해보라. 교회 전체의 분위기가 교회 건축을 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목사 한 사람의 꿈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사 한 사람만의 꿈이라면 아무리 목사라도 이런 꿈을 내세울 수가 없다. 그 교회 교인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오늘날 목사 청빙에는 조건이 달린다. 교인수를 몇 년 내(대개는 3년)에 일정 수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청빙을 취소한다는 조건이다. 이것이 쉬워 보이는가. 또 이 조건에 담겨 있는 생각이 무엇인가. 교회가 커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고이다. 교회가 커지면 교회는 당연히 예배당을 건축한다. 그러니까 이 기사에서 말하는 교회 건축이란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예배당의 건축이며 그것은 교회가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목사 개인의 영웅심 내지는 욕망이 투사되어 있긴 하지만 이런 사고가 교회 전체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목사가 교회 건축을 꿈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개가 한 마리 나왔다는 내 표현은 이스라엘의 사고를 차용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 쏘시개'나 '개'로 인식해왔다. 결국 개라는 사고는 여호와 신앙을 갖지 않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 박살이 난 목사야말로 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개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개 박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이 말씀은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후에 야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갈멜 산에서의 영적인 승리 이후에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이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도륙하여 이스라엘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러면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이세벨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어쩌면 그것이 많이 억울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것으로 상황에 항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 하나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충분히 이해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물과 음식을 먹게 하신 후 그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라. 왜 엘리야가 자기 하나만 남았다고 이야기 하는가. 엘리야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한 이스라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가 그런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승리를 그처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면 적어도 엘리야의 편에서 엘리야를 보호해주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나야 했다. 그러나 이세벨이 죽이려 할 때 이에 저항하는 이스라엘이 없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그런 상황을 자기 하나만 남았다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잘 묵상해보자.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을 남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남기신다. 여기서 칠천 명이란 어느 정도 많은 사람일까. 적어도 이스라엘은 수백만이었다. 그렇다면 칠천 명이란 극소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 내가 늘 말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다. 수백만 이스라엘 가운데 겨우 칠천 명만이 참 이스라엘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맘몬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하나님은 새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맘몬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남기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엘리야가 느꼈던 외로움이다. 엘리야는 절박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고독감이야말로 진리의 길을 가는 이들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고독은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의 숙명이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보다는 내가 하는 말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 바로 이 고독에 대한 지적이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그러는 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고. 네가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을 에둘러간다.

아전인수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이 내가 진리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남은 자의 숙명대로 내 곁에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칠천 명을 남겨두신다. 언제든 필요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만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엘리야는 이미 그 칠천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 3억 4천만 원을 펀드에 투자한 목사가 한 일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맘몬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목사는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했다. 나는 그가 펀드에서 개 박살 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펀드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 교회를 건축했다면 그것이 누구의 일이 되겠는가. 맘몬의 일이다. 그가 개 박살 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여기서 두 번째 잘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헌금을 펀드에 투자해서 돈을 불렸다면, 그의 생각대로 되었다면 교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그들은 그 목사를 칭송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사를 통해 그런 일을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과연 개 박살이 난 목사를 비난하는 자신은 정말 맘몬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돌아보라.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누가 개 박살이란 용어를 생각해낸 것인가. 절묘하게도 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일컫던 이스라엘의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정작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이스라엘 자신인 것은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나는 맘몬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시금석이다. 우리가 맘몬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아야 우리는 하나님이 남기시는 칠천 명에 속할 수 있다. 표현이 좀 미안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