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6.1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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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 예수여, 우리의 눈 위에도 손을 얹으셔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소서!

오 주님 우리 눈도 열어주셔서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일을 보게 하소서!

오 주여, 우리 마음에도 비전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알게 하소서!

오리겐의 기도이다. 그는 공과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진정성을 믿는다. 특히 이 기도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믿음은 결코 내세적이 아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성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바라는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믿음은 그것을 실상으로 만든다.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준다.

그러나 오리겐은 다만 그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보이는 것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만큼 중요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올인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돈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돈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사람들을 현혹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실상이라는 말이다. 그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비교해보라.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 우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의 역전을 일어나게 한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본질적으로 미래지향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조삼모사라는 말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아침과 저녁이라는 짧은 시간도 감내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에게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어지라는 말과 같다. 고봉으로 밥을 주면 생일날로 여기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고봉밥에서 생일을 연상한다.

본질적으로 미래지향적인 믿음은 그래서 인간에게 어렵다. 여기서 돈 이야기를 좀 생각해보자. 돈이 왜 그렇게 인간에게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지 아는가. 돈이 가진 유사전능성 때문이다. ‘유사전능성’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돈은 전능하지 않다. 그러나 전능함과 유사한 전능성을 보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돈은 가시적이라는 말이다. 돈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신의 전능함을 입증하고 과시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미래지향적인 것,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들로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과 경쟁하지 않으신다. 그 과정이 곧 당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돈을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상과 증거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것이다. 여기서 성서가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조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돈을 미워하려 하면서 돈을 극도로 존중한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돈이란 우리가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돈이란 극도로 막강한 영적인 실재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돈에 함몰되고 만다. 우리가 죄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보다 먼저 우리가 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을 미워하려면 돈을 존경하고 경외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돈을 미워할 수 있다. 우리가 돈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 보다 돈을 미워하는 것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물론 가난은 돈을 미워하는 가장 확실한 믿음의 표현이다. 가난을 모토로 삼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돈을 미워할 수 없다. 때로는 어리석어 보일 것이고, 때로는 가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돈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밖에서 미술 강의를 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달콤한 초콜릿과 함께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음미하는 한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면서 받은 후원금으로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고민하는 한 봉사자의 이야기도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이들은 돈을 미워하기만 하지 않는다. 돈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래서 이들은 돈을 정말 미워할 수 있다. 실감이 나시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돈을 존경하는 그 시간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시간이다. 그렇게 돈과의 싸움에 긴장을 풀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돈을 미워하는 신앙의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돈을 섬기는 삶은 보이는 것을 보며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돈을 섬기는 것은 매우 실재적이며 현실지향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추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쉬워 보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영적 싸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재로 그렇게 산 사람들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경배했다. 그들은 내면 깊은 곳까지 성령에 사로잡혀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았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내면 깊은 곳까지 성령에 사로잡혔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령을 상징한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따라 행진을 진행하고 멈추었다. 생각을 해보라.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는 그들에게 어찌 조급함이 없었으랴. 그러나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을 바라보고 밤에는 불기둥을 바라보았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자체가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여호와의 철옹성이었다.

그렇게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그들이 감당치 못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검투사와 싸우다 죽고, 사나운 맹수들의 먹이가 되었다. 껍질이 벗겨져 죽었고, 기름에 튀겨져 죽었다. 죽은 후에도 십자가에 달려 밤의 어두움을 밝히는 가로등(타르를 발라 태워)이 되었다. 그런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오리겐의 기도대로 주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조그마한 어려움도 감내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초기 초기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믿음의 길에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오늘날처럼 돈이 모든 것인 세상에서 신용불량자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면 나는 신용불량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신용불량자라도 된 것이 감사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신용불량자이지만 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기적을 경험한다. 내면 깊은 곳까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기적이란 기적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평범한 일상이 오히려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새 힘을 얻었다. 믿음의 선순환이다.

그런 삶은 결코 피상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에서만 느끼고 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까지 보이는 실재였고 현실이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교회가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그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마카리우스 마그네스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오직 겨자씨 같은 믿음, 불가능한 일을 행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이 믿는 자들 모임에 속할 수 있다.”

반성만 하지 말자. 부끄러워하기만 하지 말자. 이젠 우리 차례다. 우리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겨자씨 같은 믿음, 불가능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고 교회가 되자.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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