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라면
제자라면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6.25 0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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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 그리스도교 이야기 중에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박은조 목사님이 영동 교회에서 한 일이다.

어느 날 박 목사님은 장애인 한 사람을 보았다. 영동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러 온 사람이다. 휠체어를 타고 온 그 사람은 이층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다. 두 사람이 그분과 어깨동무를 하고 그 사람의 다리를 들고 예배당 안으로 나른 것이다. 박목사님은 그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심히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2층밖에 안 되는 예배당이지만 그 사람이 흉한 꼴을 안 보이고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장애인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생각이었는가. 그것도 사천 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말이다.

잠시 멈추어 충분히 한 번 생각을 해보라. 박목사님의 이런 결정이 정말 합리적인 결정이었는가. 여러분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엘리베이터 설치에 동의하시겠는가.

물론 엘리베이터 설치에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박은조 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그런 결정을 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같은 상황을 목격했더라도 장애인의 모습이 보기 안 좋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더욱이 그 한 사람을 위해 사천만 원이라는 헌금을 들여 필요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일에 반대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장면을 보면 사람들은 대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양 다리를 벌리고 남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해야 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그런 장애인을 들고 나르고 있는 두 사람의 섬김에 주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사람들은 미담사례라고 한다.

얼마 전 나는 글에 한 지체장애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썼다가 그 지체장애인의 이야기를 자랑처럼 소개했던 목사의 접근금지 처분을 받아야 했다. 다섯 살 정도의 지능을 지닌 장애인에게 한글을 가르쳐 글자를 몇 자 읽을 수 있게 한 일은 잘 한 일이다. 그러나 그 자랑은 주인공이 된 지체장애인의 존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그들이 자랑하고 부각하고 있는 것은 그 지체장애인이 아니라 한글을 가르친 사람과 그렇게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무언의 교육을 충실하게 해왔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를 말한다. 어떤 일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라고, 자신이 한 자랑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함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특성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 말씀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없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송두리째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엎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위대하고 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이 쉬워 보이는가. 아니다. 이 말씀은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실천할 수 없는, 아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성숙한 모습이다.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내가 서두에서 언급한 박은조 목사님의 결정과 실천이 얼마나 당연한 일이었는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곳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극소수의 사람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고 섬기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교는 이와 정 반대의 길을 간다. 오늘 아침에 본 기사의 내용이다.

"성소수자를 비롯해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더 많은 사람이 역차별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정상화하거나 정당화하면 안 된다.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하고, 소수의 차별을 막기 위해 다수가 역차별 당하도록 할 수는 없다. 다수가 처벌받는 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

한교총 기도회에서 대표회장인 소강석 목사가 설교 중 한 말이다. 소강석이라는 사람이 함량미달의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이철 감독회장은 "'평등에 관한 법률안'의 숨겨진 내용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한교총 대국민 서신을 낭독했다. 대국민 서신에는 "평등법이 제정되면 동성 결혼 합법화에 이어, 양성애를 인정하기 때문에 남성+여성+남성 또는 여성+남성+여성의 결합을 허용함으로써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가 붕괴될 것"이라거나 "성별 정체성을 차별 금지 사유에 명시했기 때문에 본인이 여성이라 주장하는 남성들이 화장실 등지에서 여성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왜곡·과장된 주장이 들어가 있었다.

이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大人 중심의 사고인가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사람들이 목사가 아니라면 이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의 지혜로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절대다수의 절대 행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로는 희생양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마침 풀러신학교 원로교수 김세윤 박사가 시민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가장 큰 위기상황이라고 진단하며 이런 말을 했다.

김 박사는 근본원인으로 '신학의 미숙함'을 꼽으며 "오늘날 한국교회는 생명을 살리고 정의와 화평을 확장시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왜곡된 복음으로 기독교와 반대되는 가치들을 확대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7·80년대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인격적·사회적 가치들을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로 급성장하게 됐고, 그 가운데 오만함이 자라났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도리어 왜곡된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며 "교인이나 목사나 성경 해석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 성경을 문자적, 율법적, 미신적으로만 읽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단의 신학과 얼마나 다른가. 복음의 왜곡, 신학적 미숙, 성경 해석의 근본적인 오류들, 성경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성경 문맹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위기에요. 근본 원인이에요. 복음의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그걸 삶에서 표현하는 제자도 훈련이 안되어 있습니다."고 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오만해져서 섬기는 종은커녕 세상의 대인들이 되었다. 그렇게 세상의 대인이 되면 아무리 성서를 다 외운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영원히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불의한 사회가 된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이 아니라고 말한 사실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강석 목사는 “소수의 차별을 막기 위해 다수가 역차별 당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말을 했다. 그가 역설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하나님 나라는 소수의 차별을 막기 위해 다수가 역차별을 당하는 곳이다. 그것도 기꺼이!!

결국 이런 세상의 대인이 된 목사들이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오만함에 함몰된 한국교회 위기의 선봉장들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입을 통해서도 당신의 마음과 뜻을 전달하신다. 그것이 바로 소수의 차별을 막기 위해 다수가 역차별을 당하는 것이다.

당신은 장애인과 장애인을 나르는 사람 중 누구에게 주목하는가.

당신은 소수의 차별을 막기 위해 다수가 역차별 당하도록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무조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 편에 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나는 당신이 복음의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그걸 삶에서 표현하는 제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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