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길
멀고 먼 길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7.1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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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틈만 나면 여행을 계획한다. 내가 주체가 아니니 딸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딸들은 내게 무엇이든 값을 말하지 않는다. 그걸 말하면 불편해지는 나를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룻밤에 수십만 원 하는 숙박비를 마다하지 않고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이처럼 힘든 것인지를 예전엔 미처 몰랐다.

어쨌든 지난주에도 가평의 한 펜션을 갔다. 육 개월도 안 된 손자와의 두 번째 여행이다. 녀석이 물을 좋아한다. 작은 수영장과 스파가 있는 곳을 정한 이유이다. 집의 욕조에서 파닥이며 발을 차는 녀석에게 마음껏 수영을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결정이었다. 도착 후 수영장에 녀석을 안고 들어갔다. 녀석이 마음껏 발로 찰 수 있는 튜브를 목에 걸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몇 번 발을 차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는지 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을 안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몇 번의 발차기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행복해졌다.

방에 딸려 있는 바베큐장에서 저녁을 먹었다. 준비해온 각종 음식들을 펼쳐놓고 사진촬영을 하였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매일 공짜로 참여하는 것이 늘 미안해서 이번에는 고기를 준비했다. ‘아웃 백’에서 거의 이십 만원 가까이 주고 먹었던 기억이 있는 토마호크를 샀다. 중간 크기로 두 개를 샀다. 우리가 먹기에 충분한 분량이다. 두꺼워서 익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큼직하게 잘라 놓으니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그날의 메인 요리로 손색이 없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를 차례로 구워먹었다.

사실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거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 말레이시아 샹그릴라에서 만났던 호주인 부부와도 내가 평화주의자라고 했더니 완전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호주에 오면 자신을 찾아달라는 부탁까지 하였다. 평화주의자라는 단어 하나가 그렇게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평화주의자들이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아도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이해하는 이들을 보기란 어렵다.

사실 평화란 가장 오래된 기독교 가르침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요체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모른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데 복음이 말하는 평화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분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표정이다. 나는 목숨을 걸고 차별금지법 반대를 관철하겠다고 말하는 대형교회 목사의 단호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표정에서 폭력을 본다. 결연한 의지와 폭력은 어느 정도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의 결연한 의지는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표정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프란치스코는 내가 아는 가장 탁월한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의 한 복판에서 적의 우두머리인 술탄을 찾아갔다. 놀라운 것은 술탄이 그를 죽이지도 않고 그 전쟁에서 이긴 후에 취한 조치에도 프란치스코의 설득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피조물과도 평화했다. 그는 사나운 늑대조차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놀라운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그런 노력이 프란치스코의 수도원과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에도 중요한 한 흐름을 차지한다. 발덴시안(발도파)과 체코형제회(모라비안)와 같은 중세 평신도 갱신 운동에도 평화주의의 흐름이 관통한다. 그리고 그것은 메노나이트, 아미시, 후터라이트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들과 부르더호프와 퀘이커와 같은 신자들의 교회의 전통 속에도 똑같이 흐르고 있다.

어쩌면 이 평화의 이해가 진정한 복음 이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이해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밀라노 칙령과 신앙의 자유에서 발견한다. 평화주의자의 복음 이해를 가지면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 세상 혹은 황제의 승리가 된다.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 안에 폭력이 자리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든 일탈이 질서정연해진다.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세계관을 따르는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화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을 넘어 복음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기독교국가체제 교회(Christendom Church)들이 되었다. 그래서 늘 세상을 점령하고 고지를 점령하자는 이야기가 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점령하고 고지를 점령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세상을 점령하고 고지를 점령하는 순간 그 사람은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관점과 시선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오히려 불의한 세상으로 인식될 뿐이다.

평화주의자가 되면 오늘날 교회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종교다원주의자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이 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힌두교인(간디), 무슬림(바드샤 칸), 자연주의자(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유대교 랍비(아브라함 헤셀, 마이크 레너), 월터 라우센 부시를 비롯한 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라차드 로어와 같은 가톨릭 신자, 그리고 틱낫한과 같은 스님들이 모두 나의 스승들이 되었다.

나는 내가 종교다원주의자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국가체제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종교다원주의자로 보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인류는 물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나라의 평화 안에서 만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 평화의 한 갈레가 바로 비거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고기 없는 삶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욕망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욕망은 죄의 법의 실체이다. 죄의 법은 인간을 사로잡는다. 사로잡는다는 말은 결국 협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늘 할 수밖에 없다. 신앙의 길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떤 것은 깨달음과 함께 실천이 가능하다. 그러나 더 많은 것들이 깨달음과 실천이 함께 가지 않는다. 비거니즘이 바로 그런 예이다. 비거니즘을 통해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더 많은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욕망은 은밀하고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일부를 사로잡는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욕망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모순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경계’의 삶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비움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공동체의 중요성은 여기에서도 다시 부각된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리의 길이 험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고 격려하는 도구와 과정이 되어야 한다. 같은 길을 가는 자매와 형제들의 격려와 인정 그리고 이보다 중요한 날카로운 지적은 그리스도인의 모순을 줄여가고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왕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모순된 일상의 삶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엔도 슈사크가 <침묵>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주님의 메시지이다. 나는 비거니스트의 길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나는 여전히 욕망의 지배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합리화가 아니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것도 아니다. 나는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이다. 하지만 언제든 졸 수 있고, 언제든 적의 침략을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최선을 다하고자 할 때 주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나는 여전히 가난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비거니스트도 아니지만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를 좇아 평화의 길을 간다. 이 평화의 길에서 나는 자매와 형제 된 이들을 만나고 싶다. 그 길은 멀고 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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