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7.23 00: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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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유대교 정통파(하레디) 이야기를 글의 소재로 삼았다. 오늘날 돈에 경도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그야말로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도서관에 모여 시끄럽게 율법을 토론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차림새까지 기괴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국민의 11%에 달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게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대로 낳고 있는 그들을 이스라엘 국민이 여전히 용납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유대교 종교생활의 본(!!!)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나팔을 불면서 강압적인 태도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상인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레딤(복수형)의 그런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표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그들의 존재가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이 유대교라는 종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얼마나 존중하는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을 그들은 기억하고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는 말을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그 존재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안식일이 있었다. 안식일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가장 확실한 비결이자 방안이었다.

오늘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배는 중요하다. 물론 아미시처럼 2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는 곳도 있다. 그러나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코로나 국면처럼 비상의 경우에도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회당이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안식일을 준수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대면예배를 주장하는 것은 복음에도 어긋나며 순수한 목적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대면예배를 포기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각 가정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교육하고 안내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실 그동안 예배가 왜곡된 측면이 많았다. 개신교 예배가 설교 중심이 되면서 설교의 권한을 가진 목사가 교회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는 지배체제가 형성되었고 가톨릭 역시 성체성사라는 의식 중심이 되면서 그 의식을 주도할 수 있는 사제가 교회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 모습은 결코 권위가 없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모습은 세상의 하이어라키이지 하나님 나라의 평등구조인 유기체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작금의 코로나 정국이 이것을 교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해서 예배가 중단되는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그것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회당이 없는 곳에서도, 예배를 드리면 죽는 곳에서도 안식일을 지키고 이어오지 않았는가. 오래도록 그런 삶을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이기에 신앙생활의 본이 되는 하레딤들의 귀중함을 아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한 카페교회의 성공 기사를 읽었다. 사람들은 카페교회를 자비량목회의 시대적 요청으로 이해한다. 나는 이 사실에 반대한다. 카페교회라는 형식으로 교회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카페교회는 증언하고 있다. 복음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카페를 하던, 교회를 개척하든 본질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본이 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단순히 대속의 주역으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인의 본이 되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빌립보서에 기록된 “그리스도 찬가”를 늘 애송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비우심의 기록을 묵상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았다. 그들은 결코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본이 되지 않고 말로만 전하는 복음은 복음전파가 아니라 복음의 사망이다. 그것을 오늘 우리가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의 존재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생충이다.

믿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분이 보이신 본을 따르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교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방식이 본이 되는 것임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본이 되었다. 그것을 보라는 것이다.

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로 복음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대로 사는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그리스도 자신이 믿음의 본이 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매와 형제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고, 자신을 본받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자매와 형제들을 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카페를 차려서라도 교회를 유지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비량 목회로 교회의 명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목사와 신부들이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와 신부들이 본이 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본이 되어야 한다. 그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자신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한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본질의 의미이다.

그렇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본이 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된다면 예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유대인들이 이천 년 동안이나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차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어가는지를 세상에 보여줄 차례가 되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복음을 살아내는 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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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e 2021-08-02 13:23:44
꽉 막히고 의무도 다하지않는 극단주의 유대교도의 특권을 바라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