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라는 선물
고통이라는 선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8.0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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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기독교 서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년과 노년 사이의 한 여성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대단히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자신이 서점에 온 이유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아는 교인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 환자가 읽을 만한 책을 고르고 있다고 했다. 옆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내가 그녀에게 책을 하나 소개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폴 브랜드라는 의사가 지은 책이다. 그녀는 그 책을 집어 들고 잠시 살펴보더니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망한 교회를 보았다.

<고통이라는 선물>은 나환자의 친구 외과의사 폴 브랜드의 생애와 헌신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감사를 담아낸 책이다. 사람들은 나환자들의 손발이나 코가 잘려나간 것을 나병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병균은 살을 썩게 만들지 않는다. 나병균은 신경을 죽인다. 신경이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쥐가 손이나 발을 뜯어먹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환자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쥐가 손과 발을 뜯어 먹어 수많은 나환자들의 손과 발이 사라진다. 쥐가 아니더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몸의 반사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몸은 뜨거운 것에 닿으면 반사작용에 의해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데더라도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려 불에 닿은 몸이 익는 것을 방지한다. 발이 삐끗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발이 삐끗하는 순간 우리 몸은 반사작용으로 점프를 한다. 그래서 발목이 부러지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발이 삐끗해도 점프를 하지 않는다면 발목이 부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눈도 마찬가지다. 눈에 무엇이 다가오거나 들어오면 우리 몸은 순간적으로 눈을 감게 만든다. 또 눈이 건조해지면 저절로 눈을 깜빡여 눈물로 눈을 적신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무엇인가가 우리 눈을 찔러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이 말라 보지도 못하고 감염이 되어 염증이 생겨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눈을 깜빡이지 않게 되고 결국 실명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환자들의 신체가 훼손되는 것은 나병균에 의한 훼손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 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깨닫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역설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인체가 얼마나 신비한가를 절감했다. 우리 몸의 세포에는 디엔에이라는 것이 새겨져 있다. 이 디엔에이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에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보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어느 하나도 세포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전체 몸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적확한 과학적인 사고인가.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과학이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몸의 세포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몸의 정보가 새겨져 있고 몸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함은 물론 위기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정해진 기간 동안의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몸 밖으로 배출된다.

교회가 유기체라는 말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그냥 전체를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 개인 하나, 하나가 우리 몸의 세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세포가 죽으면 결국 전체 몸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수명이 다해 사라지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세포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많은 수의 세포가 죽는다면 몸은 치명적인 상해를 입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포 하나와 몸 전체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몸은 하나이다. 그리고 세포는 몸 전체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몸의 생명과 직결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포는 동일하게 전체 몸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

여기에 대표가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어떠한 교회의 대의기구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모든 교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고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해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전체 몸의 디엔에이가 새겨짐으로써 몸을 위해 작용하고 희생하게 된다.

교회가 유기체라는 사실을 안다면 교회는 결코 민주적인 운영이라는 말 자체를 거론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라는 디엔에이가 새겨져 있다. 그 디엔에이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서로 간에 다른 디엔에이는 없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결정은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민주적인 교회 운영이라는 말이 교회 안에서 화두가 되고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유기체가 아니라 조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조직화는 곧 교회의 사망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몸인 교회의 고통을 교회의 구성원들이 동일하게 느끼지 못할 때 알 수 있다. 또한 세포들이 서로의 고통을 인지하지 못할 때도 그렇다.

내가 우리 교회의 예배를 드리지 않고 휴면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인들은 서로의 고통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각자의 고통은 각자의 몫이며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인생의 질고일뿐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유기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조직에 불과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고 예배를 중단했다. 교회는 유기체이어야 한다.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유무상통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이기를 힘쓰고 기적이 일상이 된 성령공동체가 된 것도 모두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디엔에이가 새겨져 있는 유기체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라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살고 죽는다.

그렇다면 초기교회가 유무상통하는 원시공산사회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초기그리스도인들이 동료 그리스도인 사형수를 위해 대신 죽는 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잘 생각해보라. 무엇이 교회를 조직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는가.

돈과 권력이다. 돈과 권력이 교회를 조직으로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살했다.

나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확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지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임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으면 나환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쥐에 뜯기고, 불에 데고, 부러지고,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 섬김과 희생만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보라.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발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환란을 당하면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기까지 했던 이유를 이제 우리가 다시 배우고 경험해야 할 때이다. 나는 고통이 선물이 되는 교회를 꼭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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