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8.18 0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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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 신부만 집전할 수 있다.

설교와 축도는 목사만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이단의 혐의를 짊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객체화이다. 사제와 신부를 제외한 그리스도인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객체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의 사망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인들을 객체로 만드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를 객체화의 공범으로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서두에 언급한 두 가지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안의 계급과 차별이 바로 이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교육학자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곤 한다.

“국가는 국민을 난장이(dwarfs)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난장이가 된 국민은 정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면 난장이가 된다. 그리고 난장이가 된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나는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하여 난장이로 만들면 난장이가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객체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객체가 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입신양명이다. 결국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주체가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이유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객체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개신교 신자는 물론 가톨릭 신자들과의 교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둘의 생각과 하는 말에 공통점이 있었다.

“다 나 잘 살자고 믿는 것이다.”

이 생각은 단순히 어떤 일부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이고도 일반적인 생각이다.

얼마나 비복음적인 이야기인가.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의 소유를 실천할 수 있었고, 형제애를 기반으로 하는 교제가 이루어졌고, 결국 그것이 모든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했다. 그들의 이런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고 그들의 하나님 나라의 삶이 세상을 이겼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될 때 가능하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그 진위가 가려진다.

나는 오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무슬림이다. 그는 아프간 정부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인 랑기나 하미디(45)이다. 그는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진입한 당일 아침에도 사무실에 출근해 동요하는 직원들을 달래고 가장 마지막에 퇴근했다.

이날 자택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원격으로 영국 BBC방송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하미디 장관은 “지금 나는 창문에서 최대한 떨어진 복도에서 인터뷰하고 있다”며 “내일 아침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열한 살짜리 딸이 있다면서 “나 역시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어머니와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그는 또 “내 딸이 꿈꿔왔던 모든 미래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며 “만약 살아남는다면 수백만 소녀들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미디 장관은 어릴 적 소련의 아프간 침공(1979년)으로 집을 떠나 파키스탄의 난민촌에서 생활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해보자. 그는 난민 출신이다. 난민 출신은 망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난민 출신임에도 그는 공부를 마친 후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생각을 해보라.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몰랐겠는가. 아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당하는 비참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여성임에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 2008년 여성의 사회·경제적 자립을 위해 공예품을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을 창업했고 지난해 아프간 정부가 들어선 지 20년 만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다. 여성들의 권리신장이다. 여성들의 해방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건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임지를 지킬 수 있었다. 아니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더구나 그에게는 열한 살짜리 딸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차량 네 대에 돈을 가득 싣고 아프간을 탈출했고, 돈의 일부는 탈출용 헬기에 다 싣지 못해 활주로에 남겨둬야 했던 대통령 일행과 함께 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이라는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오늘날 교회가 무기력해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나 잘 살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타인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타인을 위한 존재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주된 이유는 주체가 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객체들이 되었고 성직자들이 교회 안에서 대인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형수가 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서 사형수가 되곤 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들이 타인을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체가 되어 하마디 장관처럼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될 때 복음은 다시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고 설교와 축도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뇌관을 제거하는 가장 악하고도 결정적인 패착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명실상부하게 聖職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없다. 이것은 평신도를 살리는 일이 아니라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살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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