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사다
나는 목사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8.29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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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목회자”라는 그룹이 있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용서를 구한다.

아마도 무임목사가 된 목사, 혹은 자비량목회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것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어떤 차들을 보면 차 뒤에 해병대 로고가 붙어있다. 해병대였었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목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도 일하는 목사라고 하지 않고 일하는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현역에 있는 목사만을 목사로 여기는 세간의 인식을 반영한 처사일 것이다.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먼저 교회 안에서 목사가 가지는 권위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의 권위는 그야말로 끝판왕이다. 감히 목사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는 교회를 떠나려는 결기를 다진 이후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교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인정이 그리울 수도 있다.

그 다음으로는 목사가 되기 위해 치른 대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창 나이에 생업을 접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망설여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처음에는 야간대학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야간대학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서 입학하자마자 합숙을 해야 하는 신대원을 대상에서 제외했다. 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가 있는 나에게 그건 당연했다. 그러나 결국 오로지 신대원만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까 누구든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出家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출직업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출가에서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모든 인연을 끊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직업도 포함된다. 그런데 거기서 직업은 사실 그렇게 상위에 속하는 어려움이 아니다. 현실의 불편함이라는 강력한 요소가 있긴 하지만 목사 역시 직업이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누구나 최소한의 기회손실비용이 발생하기 마련이 아닌가. 그렇다면 직업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업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돈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직업을 떠나거나 버린다는 것은 돈 벌기를 일단 멈추는 것이다. 경제적인 수단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덕을 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내의 희생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방식이 모두 사실은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기꺼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무방비 상태가 되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돈은 각자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가 철저하게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입히고 먹이고 거주할 집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없다. 물론 그것을 꼭 집어서 질문한다면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믿고 있다고 호기 있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은 물론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서슴없이 외치고 다니면서도 실상 경제적인 부분만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미 불행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 하나님의 책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이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그래서 나가서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일단 살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 믿음일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이 그토록 힘 있게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거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호기 있게 말했던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적어도 목사가 되려는 결단을 하는 순간 최소한 그런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위기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다. 설사 그 어려움을 돈이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라도 그것은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내게는 그런 어려움들이 주기적으로 다가왔다. 이십 년 가까이 가난하게 살면서 그런 위기들이 없었겠는가. 당연히 가난한 만큼 그런 위기들은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정도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일단 월세로 내는 집세를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월세를 밀린 적이 없다. 내가 돈을 벌지 않았다. 아내도 좀 벌긴 했지만 그것으론 턱도 없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그것도 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내가 느끼는 부담감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바로 내가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믿음에 따라 돈 버는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책임한 가장’이라는 주님의 멍에를 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이 내게 죽음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나는 그 멍에를 기꺼이 졌다. 그리고 주님의 공급하심이 약간은 인색하다고(내 욕망 때문에)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정말 단 한 번도 시간을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이십 년을 지낸 후 이제 나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거의 완전히 무책임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걸 최근에야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님이신 주님이 내게 진짜 주님이 되시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어려움과 위기는 수시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시킨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이 살포시 스며든다. 그걸로 끝이다. 그토록 저항하기 어려워보였던 위기와 어려움들이 결코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교회를 담당하지 않았음에도 목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평소에 결코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는다. 심지어 양복도 잘 입지 않고 넥타이는 더더욱 매지 않는다. 친구가 늘 내게 넥타이를 주겠다고 해도 그것을 거절하는 이유이다. 나는 두 개의 넥타이만을 필요에 따라 맨다. 경조사가 있기 때문에 검은 넥타이가 필요하다. 그래서 두 개다.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목사의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때이다. 돈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주로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을 내가 교회를 하거나 어떤 가시적인 일을 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지금은 주님이 내게 글을 쓰라고 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일 글을 써보라. 그게 가능한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물론 나는 글을 쓸 수 없는 날에는 글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생각을 정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글을 쓴다. 주님은 나의 작은 재능까지도 아시고 사용하신다. 글이 아니더라도 주님은 나를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일하는 목회자란 이름의 의미는 사실 목사이기를 포기하면서 목사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내가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용서를 구한 것이다. 일하는 목회자란 그냥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목사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주님은 목사라는 정체성도 지켜주신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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