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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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9.18 0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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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의 장례 기사를 보았다.

14일 별세한 故 조용기 목사에 대한 조문이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마련된 조문소에서 15일 아침부터 시작된 가운데, 교계 원로 목회자 등이 이날 오후 조문소 옆 별도의 공간에서 유족들과 함께 위로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는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를 비롯해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원로),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장종현 목사(예장 백석 총회장),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등이 참석했다.//

이들이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의 설교(김삼환)나 기도(오정현)의 내용도 있었지만 인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했다. 유유상종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아도 이젠 더 이상 화도 나지 않는다. 하도 많이 보아왔고 그것을 지적하는 글도 꾸준히 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하는 일을 ‘역시나’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본질을 잠식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그런 활동들에 대해 누군가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용기 목사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일구었다. 그는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인이 되었다. 그는 목사로서 경호원을 대동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정말 큰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비슷한 업적을 이루어낸 목사님들이 모여 서로를 높여주는 예배를 드렸다.

자랑할 만하다.

그런데 과연 정말 자랑해도 좋을까. 교회가 세상과 같다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안다면 자랑할 수 없다. 결단코 자랑할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의 그런 모임을 통해서도 오늘날 교회들이 얼마나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 이야기를 해야겠다. 바울은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유대교의 엘리트였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금수저’요 부자였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 그는 이전에 자랑으로 알았던 것들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랑하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전의 자랑들을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자랑이란 스스로를 높인다. 무엇이라도 자신을 높이는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허물게 된다. 그래서 이전에 자랑할 수 있던 것들이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된다.

나는 기사에 보도된 그 예배를 기획한 사람이 김장환 목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용기 목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조용기 목사와 비슷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 예배의 사회와 성서봉독을 극동방송 사장과 부사장이 했다. 기획자로서 김장환 목사는 순서에서 빠졌다. 이들의 예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허무는 일이었다. 이들은 대인들이었고 대인들만의 모임을 연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렇게 이해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바울이 그냥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회심한 후 무려 13년을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했다. 그리고 낮은 자의 시선으로 복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히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시간이 아니다. 완전히 무력해지고 완전히 가난해지는 시간이다. 그렇게 완전히 가난해지고 무력해질 때 시선의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 나라가 마음에 새겨지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의 임의대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우고 약해짐으로써 성령이 자신을 통해 일하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처럼 커져서 성령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신을 비워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니 성령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된 것을 더 대단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 일은 사단이 하는 일이다. 파우스트를 쓴 괴테는 그것을 잘 파악한 사람이다.

사진을 보니 조용기 목사의 장례식 조문대 위에 “천국 가신 조용기 목사님”이라는 글이 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소로운가 보다.

조용기 목사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따로 예배를 드린 목사님들도 저마다 대단한 일을 하신 분들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일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성서가 인간을 향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약함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서는 일관되게 이 ‘약함의 신학’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자랑이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스펙을 자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도 자랑하지 않는다. 그가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보라.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바울이 기뻐하고 자랑하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겪는 생고생이라고 단언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말을 듣고 그에게 몰려들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찌할 것인가. 그의 장례식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던 그 위대한 목사님들도 이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루어낸 위대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냉혹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불쌍한 영혼들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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