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걷다
환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걷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9.24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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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란 무엇일까.

오늘날 교회에서는 환대가 특별한 일이 되었다. 나는 목사가 되기 전 다니던 교회에서 환대에 관한 설교를 들은 적이 없다. 내가 다니던 교회뿐만이 아니다. 신학교에 다니기 전에도 나는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테이프를 열심히 들었다. 그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도 환대를 주제로 한 설교를 듣지 못했다.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기억 속에 환대라는 단어를 남겨 넣은 설교는 없었다. 환대란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진 그리스도교의 미덕일까.

그렇다면 환대라는 미덕이 사라진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환대가 사라진 교회를 교회라고 생각할 수 없다. 환대란 단순히 사람을 대접하는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가 곧 환대라고 생각한다. 환대란 그저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환대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거나 그래야 하지만 나중에 믿음이 깊어지면 할 수 있는 일로 미루어놓는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즉각적이다. 누구라도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갈라놓았다. 제자가 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었다.(유아세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일어난 일이다. 로마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제자 아닌 그리스도인이 양산될 수 있는 대로가 열린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 길을 답습하고 있다.

환대란 근본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환대가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환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원수라도 우선 환대해야 한다. 그렇게 원수를 환대하는 순간 내 마음에서 원수가 사라진다. 원수의 마음에서도 적대감이 사라진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과 평화를 도모하며 이 땅을 평화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환대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초석이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다. 원수와 같이 상종할 수 없는 사람까지 환대할 수 있을 때 복음은 복음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정의가 넘실대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환대란 복음의 본질 가운데 핵심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오늘 임현수 목사의 기사를 보았다. 그는 북한에 체포되어 교화형을 받았던 캐나다 국적의 목사다. 그는 캐나다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체포되어 교화형을 받고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국적의 선교사들을 언급하며 정부를 비난했다.

“어떻게 자국민이 억류돼도 말 한마디 못하나?”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미 카터와 클린턴, 트럼프 전 대통령 등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 구한다. 저 같은 경우도 캐나다 수상이 저를 내보내지 않으면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무역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석방이 가능했다"며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 억류됐는데 어떻게 저렇게 무심할 수 있는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이 말을 듣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임 목사의 말을 듣고 정부에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자.

우선 미국과 캐나다와 우리나라의 입장은 다르다. 미국과 캐나다는 북한이 살기 위해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나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 국적의 사람들은 북한을 방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북한의 금지 이전에 남한의 법이 방문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무역을 끊겠다는 엄포가 그들에게 통할 수 있는가. 그래서 한국 국적의 선교사들을 풀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을 때 북한이 잘못했다고 그 사람들을 풀어줄 것 같은가. 그렇게 믿는 사람은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다. 미국과 캐나다와 우리나라의 입장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차 이전에 근본적으로 우리나라가 북한에 말 한 마디도 못하는 더 중요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만일 남한의 요구를 들어줄 테니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탈출한 식당의 종업원들을 무조건 북송하라는 곤란한 요구를 이미 받은 적이 있지 않은가. 탈북민이 얼마인가. 돌아가면 죽거나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될 그 사람들을 그러면 그들의 주장대로 북한으로 송환해야 하는가. 본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우리 측의 주장을 그들이 수용할 것 같은가.

임현수 목사는 이런 말도 했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이 공산당의 근거지가 됐다. 2천명 밖에 안 되는 악의 골수들 때문에 죄 없는 2천만 북한 동포들이 노예처럼 자유를 유린당한 채 살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임 목사의 마음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이 들어 있는가. 환대의 의미를 아는가.

그는 목사로서 복음적으로 남북관계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사고로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사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는 제자가 아니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사고이다. 환대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사고이다.

문익환 목사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서슬 푸른 냉전의 벽을 뚫고 1989년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그를 부둥켜안았다.

문 목사님의 북한에서의 다른 행적은 물론 그 일에 대한 해설이나 설명은 하지 않겠다. 문 목사님이 실천한 것이 바로 환대이다. 이 환대가 언젠가는 평화통일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런 문 목사님이야말로 예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나를 종북, 빨갱이 목사라고 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될 때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익환 목사님처럼 환대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정말 그립고 또 그립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환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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