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앎의 한계
배움과 앎의 한계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09.29 06: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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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년 전 나는 이현주 목사님의 책에서 성서를 제외한 모든 책들을 다 갖다버렸다는 내용의 글을 읽었다.

왜 그분은 모든 책들을 다 버렸을까.

집이 좁아서일까. 이사 가기가 힘들어서일까. 내 경우는 아직도 이런 이유들이 책을 줄여야 하는 이유들이다.

나도 안다. 이 목사님이 책을 버린 이유를. 아는 것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이 불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아는 앎이란 능력이 된다. 그렇게 능력이 된 앎은 힘으로 작동한다. 힘으로 작동하는 앎은 궁극적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허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막간: 사실 내 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신앙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기합리화나 자화자찬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경험이야말로 나의 복음이해와 신앙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게으른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무력해지는 시간이었으며 무력함을 배우는 가장 영적인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그 기간은 내 존재가 변하는 시간이었고 복음이 내면화되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의 의도대로 되는 시간이 아니었고 나는 이 기간 내내 철저하게 수동적인 태도만을 취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내내 나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근두운을 타고도 부처님 손을 벗어날 수 없었던 손오공과 마찬가지로 나는 수동적인 입장을 타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신앙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졌다. 가난과 비능력이다. 그렇다. 나는 가난과 비능력을 배우기 위해 이런 오랜 과정을 겪었다. 적어도 이십 년이란 시간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더욱이 인생의 말년을 향해 다가가는 시점에서의 그 기간이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가난과 비능력이라는 배우기 어려운 복음의 알짬을 배웠다. 그것은 앎임과 동시에 존재의 변화이며 개안開眼이었다. 이 과정을 지나야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

내가 지금 막간을 이용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쓰는 글들이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내 글을 읽고 내게 다가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고 돌아선다. 나는 그러한 반복이 참으로 힘들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대의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게 일어났던 반복되는 실망스러운 결과들이 이상하지 않다. 내가 늘 이야기 하는 것처럼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추체험이 필요하다. 그 최소한의 추체험도 사실 가볍지 않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아니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마음이 상하지도 않는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런 일에 실망하지 않는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앎으로 신앙을 개혁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앎이란 능력이 되는 앎이다. 그렇게 능력이 되는 앎은 하나님 나라에 무익하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역행하는 반역자들을 낳는다.

최근 나는 한 신학대에 S.T.M.이라는 과정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S.T.M.은 성경 각 과목의 본문을 풀어서 설명하는 수업을 한다. M.Div. 졸업생들이 오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목사들이 말씀을 전할 때 본문을 쉽게 풀어서 전하고, 적용하고, 그대로 살자고 외치며, 전하는 자가 성도들과 함께 말씀 앞에 부복하는, 건강한 설교자들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이 과정의 설립 취지이다.

결국 오늘날 교회의 일탈이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는 진단이 전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도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더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능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앎이다. 이현주 목사님이 모든 책들을 내다 버린 것은 아는 것이 소용없다는 주정주의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앎이 능력이 되는 것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현주 목사님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도달해야 할 공통의 목표이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라. 묵상할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누가 신령한 사람인가.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라는 수사의문문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 한 줄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묵상의 소재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앎의 한계와 무용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는 이들은 앎이 무용하다. 그런 사람들은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신령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아닌가. 바로 그런 신령한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주는 자유에 이른 사람이다. 모든 책들을 내다버리는 이현주 목사님에게서 나는 그 자유를 본다.

나는 아직 그 자유에 이르지 못했다. 부분적으로는 이르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자유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자유조차도 이 시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낯설다.

그 자유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추구하게 되는 것이 앎이다. 물론 능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앎이며 힘으로 작동하는 앎이다. 이러한 앎에도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다른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커지게 만든다. 특히 앎의 대명사인 박사라는 호칭은 그것을 듣는 개인에게 구제불능의 영적 함정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주정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주지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어쨌든 능력으로 작동하지 않는 앎이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앎과 다르다. 그 앎은 도무지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앎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 된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은 앎으로 복음을 가르치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것은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나는 가난과 비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작아지고 낮아지는 것이야말로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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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2021-10-12 09:07:38
남의 지적 게으름을 찬양하면서 왜 자기는 그렇게 못하는지 한탄하는 어리석은 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