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자녀 열전(1) 박치우
목사 자녀 열전(1) 박치우
  • 김기대
  • 승인 2021.11.0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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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 철학과 천재에서 비운의 빨치산으로
박치우와 부인 김종숙
박치우와 부인 김종숙

 

일제 강점기 조선의 수재들이 모여들었던 경성제국대학의조센진, 그중에서도 박치우(1909~1949) 일본인 교수들에게일본에도 없는 천재소리를 듣는 학생이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학생으로는 박종홍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길은 달랐다. 박치우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에 빠져든 반면 박종홍은 실존주의 철학에 몰두했다. 실존주의 철학은 언제든지 전체주의 철학으로 흐를 있다고 경고했던 박치우의 말은 옳았다. 박치우에 대한 연구서를 위상복 교수(전남대) 박치우가 시종일관 마르크스주의를 도구로 삼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박종홍의 실존철학은 일본의 전체주의·군국주의에 대한 긍정을 거쳐, 철학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반공주의와 유신의 사상적 밑받침이 ‘국민윤리’로 나아가지 않았냐고 힐난한다.

박치우는 1909 8 22 함경북도 성진(지금의 김책)에서 박창영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 박창영은 함북노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1922 돌연 자원해서 시베리아로 선교를 떠나서 17 그곳에서 보낸다.

가족을 두고 박창영 목사 혼자서 떠난 이유는 석연치 않다. 네비우스정책으로 선교 담당 교회가 지역적으로 분리된 영향일 수도 있다.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기로 했으니 평양신학교 출신의 박창영 목사는 신학이 다른 캐나다 교회와 갈등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신학교가 평양신학교밖에 없는 현실에서 캐나다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 출신을 홀대했을리는 없다.

박창영 목사가 시베리아로 것은 1922, 1910년부터 시베리아에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1919 한인 청년회원들은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1920 한글로 공산당 기관지새벽북 발간했다. 박목사는 반공정신이 투철해서 시베리아 교민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시베리아로 갔을까?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고려공산당을 창설한 기독교 전도사 이동휘의 행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함경남도 출신의 이동휘는 전도사로서 1908년경부터 주로 함경북도 지역으로 순회 강연을 다녔다. 특히 박치우의 고향인 성진지역은 여러번 방문한다. 그가 러시아로 망명하던 1913년은 박창영이 안수를 받은 해였고 망명 이동휘가 최후로 들른 곳은 성진이었다.

그렇다면 박창영은 신학교 입학 부터 이동휘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어쩌면 신학교 입학에도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의 영향으로 볼세키비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매력을 느껴 시베리아로 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버지 혼자 떠난 것도 혁명가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박창영은 스탈린 시절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인 1940 함경북도 온성군 훈계교회에서 별세한다.

박치우는 13살때 아버지와 생이별했고 그가 경성제대에 철학부에 입학하던 1928년에도 아버지는 옆에 없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그의 형수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은 있어도 아버지에 대한 회고의 글은 문장도 없다. 아버지로 인한 가난에 몸서리 듯하다. 그는 자신을 돌봐주던 형수의 죽음을 두고양의 있었으면 살렸을 터인데 동네에는한의밖에 없었다고 원통해 한다. 기독교와 서양이 전해 근대교육과 근대의료의 위력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회고하지 않지만 13 이전에 어렴풋이 아버지의 사상에 대해 들었을 것이고 러시아의 접경 지역에서 혁명 소식에도 쉽게 접했을 것이다.

대학시절 마르크스 주의에 심취한 그는 졸업후 20 후반의 나이에 평양에 있는 숭의실업전문대학에 교수로 부임한다.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하지만 조선일보 역시 1940 폐간된다.

그런데 시절 박치우는 윤동주(1917년생) 만난다. 숭실중학교 재학생이던 윤동주는 ()()전문대학 교수인 박치우와숭실활천’(숭실학교 학생 YMCA 문예부)에서 글로 조우했다. 박치우가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연희전문 학생인 윤동주는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윤동주의 유품 중에 박치우로부터 받은 엽서가 나왔으니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일보의 사람들 보면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서양화가 정현웅에 대한 글에서 박치우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좌파하면 박치우를 빼놓을 없다. 나중에 빨치산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럴 알았다 싶었다. 훤칠한 키에 야윈 몸집의 박치우는 경성제대 시절부터 박종홍과 함께 한국의 좌우익 철학계를 이끌어갈 양대 기둥으로 꼽혔다. 남궁요안나는 박치우의 누이 박덕혜와 친하게 지냈는데 박치우가 월북하면서 소식이 끊겼고 6.25 집안이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제하 조선일보의 기자였음에도조선일보의 사람들에서 정현웅을 다루는 부분에서 잠깐 언급될 뿐이다. 정현웅도 가족(아내 남궁 요안나와 아들) 두고 단신 월북했지만 박치우는 월북했다가 빨치산으로 다시 남하했으니 남쪽에서 보기에는악질이었을 그가 남긴 저서사상과 현실 오랫동안 남쪽에서 금서였고 그의 이름을 소환하는 자체가 불경이었다.

월북한 박치우는 빨치산 양성 기관인 강동정치학원에서 가르치다가 자신이 직접 빨치산 전투에 참여한다. 1949 9월에 남하한 그는 겨우 2개월만에 태백산 전투에서 사살된다. 비운의 천재 철학자 박치우는 이렇게 41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박치우가 박헌영의 직계였기 때문에 이름은 북한에서도 잊혀졌다. 박헌영 만큼 거물은 아니었으니조국을 배신한 명단에도 없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동아일보에 줄의 기사가 그가 괴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주일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1949 12 4 동아일보)

 

박노자는 그의 예지(銳智) 사상이 기독교의 예언자 사상에서 왔다고 분석한다. 예언자들의 예지(豫知) 아니지만 예언자들 역시 실천을 동반한 날카로운 지혜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박치우는 또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한다. 존재의 불안에서 출발하는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를 표현한 것일뿐 해결책은 없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식민지 조선,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해방공간에서 독특하게 펼쳐보려던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호근 교수(경희대)한국철학사에서 박치우를 가리켜 목사의 아들에서 무신론자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무신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20세기 후반부터 정치철학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박창영 목사가 가려던 길과 아들 박치우가 가려고 했던 길이 끝에서 만나는 날은 언제쯤 도래할까? 그는 나이가 어린 윤동주와 교류하면서 기독교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박치우는 유일한 저서사상과 현실 1946 11 출판하는데 김남천이 서평이 박치우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철학은 설명하는데 그쳐서는 아니된다.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명구는 이미 유명해져서 누구나 지꺼리는 말이다. 그러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한 아카데미시앙이 쩌너리즘과 가두에 진출하어 현실과 싸우며  것을 위하여 세계를 변혁하려는 분은 분도 없었다. 박치우씨 처음인 것이다. (중략). 활짝 벗어붓치고 항쟁하는 인민과 함께 세계를 변혁하려는 철학자가 그다지 손쉽게 나타날리 없지만, 박치우씨는 이런 의미에서도 놀라운 센스와 가두적인 술어와 만만한 투지와 계몽적인 노력과 함께 희귀한 하나의 존재다.(위상복, 불화 그리고불온한 시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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