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로 헌금 날린 목사
펀드로 헌금 날린 목사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11.07 0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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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본 기사의 제목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실 이 목사만의 독창적인 일은 아니다. 오래 전에 한 교회의 목사(이재록?)가 라스베거스에 가서 도박으로 큰돈을 잃었다. 그 목사의 변은 교회 재정이 어려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라스베거스에 가서 도박을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돈을 잃었을까.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만일 그가 돈을 땄다면 어려운 교회 재정을 충당하는 일에 사용했을까. 그렇게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셨을까. 그렇게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실까.

끝도 없이 질문이 이어진다. 그 모든 질문에 도박중독에 걸린 목사는 막힘없이 대답을 할 것이다. 인간의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그 합리화를 믿어주는 그 교회 교인들은 또 무엇인가. 인간의 믿을 수 있는 능력에도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사가 펀드를 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그 사람이 돈의 노예라는 사실이다. 목사가 돈의 노예가 되면 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어떨까. 그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일 수 있을까. 그야말로 어리석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건전한 투자라도 돈으로 돈을 벌려는 생각은 결국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들에게 이자를 받을 수 없었다.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준 경우에도 정해진 이상의 이자를 받을 수 없었다. 왜 유대인들에게 이런 제한이 있었을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 그들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건국 이전에 돈으로 세계를 장악한 민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을 정복한 것이 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같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펀드에 헌금을 투자한 목사의 헌금 전횡 문제와 별도로 그 목사의 세계관이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사의 사고가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목사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전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으로부터 멀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만일 펀드에 투자하지 말라고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 가장 못 견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양심의 가책이다.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양심의 가책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는 자기방어기재를 가지고 있다. 살기 위해서는 그 자기방어기재가 작동해야 한다. 성령에 충만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작동하고 있는 이 자기방어기재의 활동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성찰이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까지도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성령은 인간의 양심을 통해 그 일을 한다. 성서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 환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한 교훈은, 그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라. 속이는 영과 악마의 영의 교훈을 따르고 있는 이의 양심에는 속이는 영의 낙인이 찍힌다. 여기서 낙인의 의미가 무엇인가. 낙인은 노예의 표시이다. 속이는 영과 악마의 영을 따르는 이들은 속이는 영과 악마의 영에게 찍혀있는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제 펀드에 헌금을 투자한 사람의 양심에 찍힌 낙인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펀드에 헌금을 투자한 그 목사의 양심에 누구의 낙인이 찍혀 있겠는가. 망설이지 말라. 그 목사의 양심에는 돈의 낙인이 찍혀 있다. 목사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사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노회에서는 그 목사를 징계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바 역시 동일하다. 그 노회에 소속된 목사들 전체가 그 목사와 마찬가지로 양심에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말라. 나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노회에 소속된 목사들 역시 양심에 낙인이 찍혀 양심이 마비된 것이다.

양심에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따오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판 땅값의 일부를 가져왔으면서도 그것을 전부라고 하였을까. 그들의 양심에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속이는 영의 낙인이 찍힌 것이다. 속이는 영의 낙인이 찍히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후대의 본이 되어야 하는 초기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령은 그들을 숨지게 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들이 난무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의 거짓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양심에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내게 거짓말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맞다. 나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거짓말을 했다. 주일학교 시절 나는 내가 한 거짓말의 수가 490번이 넘는가를 센 적이 있다. 다행히 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거짓말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그 거짓말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그 거짓말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아니하며, 술에 탐닉하지 아니하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아니하며, 믿음의 비밀을 깨끗한 양심에 간직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사를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집사와 같은 단어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집사는 하나님의 집의 마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 역시 집사다. 집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짓말이 아니라 두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거짓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술에 탐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는다. 펀드와 부동산은 부정한 이득이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펀드에 헌금을 투자한 목사가 양심에 낙인이 찍힌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양심에 낙인이 찍힌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비밀을 지닐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복음의 비밀을 전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끄떡없는 교회와 노회는 어떤 곳인가.

그런 교회와 노회는 떠날 수밖에 없다. 반드시 떠나야 한다. 그런 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자매와 형제들이여, 이집트가 된 교회에서 나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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