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보다 중요한 것
예배보다 중요한 것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11.23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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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일이다. 내가 지휘하고 있던 성가대 대원 하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랑 될 사람이 다니는 교회로 갈 것이라고 했다. 슬픈 일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 대원은 우리 성가대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신랑 될 사람이 나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했다. 결혼식도 신랑 될 사람이 나가는 교회에서 열렸다. 결혼식 당일 그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는 YWCA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회를 찾아 헤매다가 결혼식에 조금 늦었다. 그 교회 전도사로 보이는 젊은이가 문 앞에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결혼식도 예배이기 때문에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들어가려는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가뜩이나 소중한 성가대원 하나를 떠나보내야 하는데 결혼식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전도사의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이 난 후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 시간에는 늦은 사람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가.

가능하면 예배 시간 전에 미리 와서 기도와 묵상으로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에서는 본의 아니게 늦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가.

물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일 아침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렸다. 정해진 시간 안에 교회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예배 시간이 되었지만 예배를 시작하지 않고 전화로 확인을 했다. 오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사람이 도착한 후에 예배를 시작했다. 생각의 차이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큰 교회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작은 교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일을 통해 생각해야 할 것은 큰 교회가 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사실이다. 큰 교회가 되면 사람이 무시된다. 교회라는 조직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시될 정도로 교회가 커지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어쨌든 나는 사람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초기교회의 예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주님의 만찬에는 오직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초기교회의 세례를 오늘날의 세례와 비교할 수 없다. 초기교회의 세례는 엄중했다. 단순히 교리를 믿고 복음대로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만으로는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는 이들의 아비투스가 확인되어야 했다. 실제 그들의 삶의 변화가 확인되어야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에게 옛사람과 새사람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 현실의 진정성이 확인되어야 예비세례자들은 비로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세례를 받을 때까지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님의 만찬은 그들의 하나 됨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하나님 백성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음식을 먹고 마셔야 했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하나 됨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만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난 최초의 빈부격차 때문이었다. 부유한 자들은 더 많고 더 좋은 음식을 준비해 일찍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음식을 준비하기가 어려워 빈손으로 오는 경우도 있었고 정해진 일들을 다 마치고 예배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늦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일찍 온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가져온 좋고 많은 음식을 먼저 먹는 일이 생긴 것이다. 나중에 온 사람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배가 고프고 먼저 포도주를 많이 마신 이들은 취하기까지 한 것이다.

단순히 교회 안에 빈부격차가 생긴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무시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금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었다. 초기교회의 관습이 그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예배가 진행 중이고 주교가 말을 하고 있는데 늦은 사람이 오게 되면 그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정해져 있었다. 예배에는 그 일을 하는 두 사람의 집사가 있었다. 그런데 늦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대응하는 방식이 달았다.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늦으면 그들에게 주교의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시킨 후에 자애롭고 선한 의지로 가득 찬 예의바른 형제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자기의 자리를 내주고 자리를 내준 사람은 그 곁에 서있어야 했다. 주교는 자신의 가르침을 늦추지 않으면서 이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특히 젊은 사람은 그 상황에서 자기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만일 젊은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주교가 그 젊은이를 의무태만자로 나무랐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도착하면 남녀의 구분 없이 대응하는 매뉴얼이 달랐다. 가난에 찌든 이가 도착하면 주교는 설교를 멈추고 그 가난한 이를 위해 주교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주교는 충심으로 그 일을 해야 했다. 주교가 땅바닥에 앉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교회에서는 부자나 유력한 사람들을 특별하게 존경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높여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적 유력함에 대한 존경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잘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가. 아니 반대인가. 나는 김장환 목사님이 수원중앙침례교회 시무 당시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청년으로부터 김장환 목사님이 세속적 유력함이 있는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이야기를 듣고 김장환 목사님에 대한 존경을 거두었다. 예배가 끝나면 김장환 목사님은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 장성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나가고 보통 사람들은 그 이후에 일어나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식사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먼저 했다는 사실에 대해 들었다. 초기교회의 행동과는 정 반대로 행하는 모습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은 주일 점심에 출장뷔페를 차려 혼자 식사한다는 말도 들었다. 이 목사님은 김장환 목사님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다. 홀로 존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낀개낀이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높여야 하는 교회의 전통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서 높임을 받을 때 그런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나는 그런 교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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