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금지법 말고 혐오 방지법하자
차별 금지법 말고 혐오 방지법하자
  • 김기대
  • 승인 2021.11.25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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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삽입섹스로만 이해하는 사람들

 

한국의 팟캐스트 플랫홈 가장 인기있는 팟빵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프로그램은정영진 최욱의 매불쇼. 얼마 프로그램에서 성소수자 특집을 했는데 댓글의 90% 이상이 우호적이었다. 2위인김어준의 뉴스 공장청취자들이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다면 매불쇼의 청취자는 그냥 웃자고 듣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훈훈한 댓글은 다소 의외였다. 어쩔 없이 성소수자가 되고 또는 성전환수술을 하는 결정을 측은하게 여기는 신파도 없었고 억지로 이해하려는 위선도 없었다. 오히려 프로그램의 성격답게 시종일관 웃음을 유도했고 조롱만큼 웃음을 자아내는 도구가 없기에 사회자들은 성소수자를 향해 조롱도 서슴지 않았지만 모두가 즐거웠다.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면 사회자들의 질문은 대부분 삽입섹스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에서 섹스는 물론 중요하지만 섹스가 사랑의 전부는 아닐진데 이야기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훈훈한 댓글과 삽입섹스에 대한 궁금증, 가지가 현재 한국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동성애관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사랑의 방법으로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졌지만 여전히삽입 대한 궁금증은 크다.  포르노 동영상을 즐겨보는 이성애자들 중에 레즈비언의 동영상에는 거부감이 없어도 남성들의 동영상에는 거부감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 한다."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오월의 봄

수전 브라운밀러의 말을 남성 동성애에 이입하면 여성을 향한 무기로 사용되어야 할 남성의 성기가 남성 자신을 공격할 무기로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남성 동성애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 오는 것이다. 

삽입 궁금증을 넘어 혐오와 공포로 받아들여지는 가장 집단이 기독교계다. 아마도 성소수자 문제만 빠진다면 기독교계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논의가 빠진 차별금지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문제는차별 재단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차별은 주관적인 영역인데 이걸 법으로 명문화한다면양심의 자유차원에서 위헌 소송이 제기될  있어서 자칫하면 양심과 신념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의 좌파 버전이 될 위험성도 있다.  

김결희씨, jtbc 다수의 수다 화면 갈무리
김결희씨, jtbc 다수의 수다 화면 갈무리

 

한국에서 드문 성전환 수술 전문 의사 김결희씨는 성전환 수술이 아니라 성확정 수술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래 정체성은 남성(또는 여성)인데 생식기만 자기의 정체성과 다르게 생겼으니 전환이 아니라 확정이라는 뜻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자기의 의식 정체성이 중요하지 그깟 생물학적 차이가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너무 저급하다. 그러면 성확정 수술이 아니라 성전환 수술이라고 부르면 차별인가 아닌가? 국경없는 의사회에서도 활동하는 김결희씨의 머리 스타일은 쪽은 생머리에 쪽은 완전히 삭발을 했다. 한국사회에서 의사의 머리 스타일로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머리를 의아해 하면 차별인가 아닌가?

교회에서 목사가성소수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설교하면 차별인가 아닌가? 이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자체로만 보면 차별일 있지만 한국 기독교인의 숫자는 신구교 합쳐 30% 언저리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70%에게 발언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그러면 오히려 차별금지법이 기독교의 보편성을 인정해 주는 셈인데 왜 반대하는가? 물론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런 묘한 역설을 이해할 수준이 아니지만 말이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은 그야말로 초고속이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급성장한 경제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듯이 급속한 민주주의 발전도 개개인의 삶에는 아직 완전히 체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진보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있다. '차별'처럼 나쁜 것은 법으로라도 잡는 것이 '절대선'이라는 강박말이다. 그래서 법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면 지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꼴보수 극우 개독교'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개혁입법활동이 '생 거리가 멀게 느껴져 ‘아마추어 정권 된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에도 원인이 있지만 생활밀착형 정치를 못한 이유도 분명히 있다.  진보에도 두려움의 정서를 보듬는 따뜻함이 있어야 하는데 가르치려고 하는 '꼰대'마인드만 작동시키다가 사달이 났다.  

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것은 법가(法家) 민주주의가 아니다. 현대법의 추세이지만 하위법이 세밀해지면 이른바 법비(法匪)들의 시장만 넓어진다. 민주주의 역사가 우리보다 긴 서구 사회에서는 하위법이 세밀해져도 관습법의 영역이 여전히 넓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오죽하면 수도이전을 반대하는 보수적 헌법재판소가 경국대전을 들고 나왔겠는가? 그렇게 사법 개혁을 외치면서 사법의 영역을 확대해주려는 시도들이야 말로 아마추어 적이다. 앞서 말한 매불쇼의 경우처럼 차별은 시민의 의식 변화로 개선될 있다.

이참에 과감하게 차별금지법을 혐오방지법으로 바꾸어라. 그리고 차별의 영역을 세분화하지 말고 이념, 정체성,인종 등으로 크게 나누면서 위해를 가하는 반대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형법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양심법처럼 취급되어 논쟁의 여지가 많아 변호사들의 밥벌이 시장만 늘어날 뿐이다. 형법적으로 접근하면 목사들의 설교를 빙자한 영향력없는 차별 발언은 지속될지 몰라도 그들이 감히 행동으로는 나서지 못할 것이다. 차별은 종교적 양심으로 도망갈 여지가 있지만 행위적 혐오로부터는 그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막히면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현재 압도적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에 돌아갈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다른 곳에는 강박이 있던 그들이 여기서는 주춤하는가? 종교계눈치? 아니다. 그들의 눈에도 동성애=삽입섹스= 혐오감, 즉 '꼰대스러움'이 남아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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