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노아가 사라졌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노아가 사라졌다
  • 김기대
  • 승인 2021.12.0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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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창세기(3)

영화노아(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 2014)’에서 대장장이의 시조인 두발가인은 노아의 방주에 몰래 탑승한다. 최초의 철기 제품이 무기였다는 점에서 대장장이는 신화적 폭력의 상징이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을 신화적 폭력과 메시아적 폭력으로 나눈다. 신화적 폭력은 지배하려는 폭력이며 메시아적 폭력은 질서를 다시 짜는 희생을 감수하는 폭력이다. 두발가인은 세상을 재편하려는 야훼에 맞서 자신의 폭력을 전승하기 위해 방주에 몰래 탑승한다. 사실노아 매우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인데 기독교계가 반대운동한다고 나서 반기독교 운동의 대상이 되는 영화로 폄훼되어 버렸다.

그런데 방주에 몰래  존재가 있으니나무 벌레. 줄리언 반스가 ‘10 1/2장으로 세계 역사’(신재실 옮김, 열린 책들) 10개의 단편 소설과 ½개의 단상으로 되어 있는역사서 아니라단편집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런 장르를 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이라고 부르며 각각의 단편은 연작집처럼 엮여 있지는 않지만 심포니처럼 서로 조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재기 넘치고 익살스럽고 사려 깊으며 인습을 타파하며 읽기에 즐겁다. 그가 우리에게 권한 소설은 역사에 대한 주석이며 기존 세계의 전복이다라는책 앞부분에 쓰인 짧은 평이 눈길을 끄는데 사람이 살만 루슈디다. 그가 누구인가? 1988 이슬람을 희화화하는악마의 세계 무슬림들의 분노를 들끓게 했던 사람이다. 이란은 그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리기도 했고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는 살해되었다.

살만 루슈디는 반무슬림 정서를 가진 괴짜가 아니라 앞서 말한 매직 리얼리즘의 대표적 작가다. 한국 작가 한강이 수상해서 더욱 유명해진맨부커상을 수상했을 아니라부커 중의 부커상(Booker of Bookers)’ 1993년에, ‘최고의 부커상( The Best of the Booker)’ 2008년에 받아 그를 부커 3관왕의 반열에 올려 놓은 소설한밤의 아이들(김진준 옮김, 문학동네)’ 저자이기도 하다. 한국 독자들에게 낯선 줄리언 반스도 이런 계열의 작가다.

‘10 1/2장으로 세계 역사 1장은밀항자. 쌍이 되었건 일곱쌍이 되었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싣기에는 척의 방주로는 어림없다. 설득력이 있으니 리얼리즘이고 그래서 방주는 모두 8척이었다고 서술하니 구약의 텍스트를 넘어 주술(Magic) 된다. 적어도 배가 8척이 되어야 하는사실적이유를 저자는 이런 반문으로 설명한다.

                                    “당신이라면 뛰면 닿을 거리에 치타와 영양을 함께 실었겠습니까?”

 

각종 동물들이 승선하는데 가치없어 보이는 곤충인나무좀벌레 승선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목수는 필수 직종이었고 나무 좀벌레는 목수들의 작업 도구에 좀벌레 형태로 붙어 있었으니 어느 밀항자보다도 떳떳하게 승선했다.  애초에 거부되어 방주 안에서도 숨어 있는 신분이니 노아를 우호적으로 볼 리 없었다. 밀항자는 시종 일관 노아를이미 6백살 대에 접어든 음주벽 있는 늙은 악한’, ‘주정뱅이’, ‘신경질등으로 묘사한다

 

노아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 모두 그의 후손들이니까 이런 생각에 당혹감을 느끼겠지만 그러나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는 괴물이며 하루의 절반은 그의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나머지 반은 우리에게 마구 호통치며 지냈던 허풍쟁이 가장이었지요. 그에게는 잣나무 지팡이가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그래서 일부 동물들에게는 오늘날까지도 매질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

 

홍수때문에 멸종된 동물도 있는데 나무좀벌레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이해할 없었다. 아름다운 동물들이 살해당하거나, (7쌍이어도 마찬가지다) 타라고 하니 새끼들과 생이별을 없는 어미 아비들이 땅에 남기로 결정한 경우도 있었다. 살기 위해 방주를 찾은 동물들은 승선권을 얻기 위한 경연대회에서 일종의 재롱잔치 공연을 해야 하는데 그것에 자존심 상한 동물들이 승선을 거부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동물권리 활동가들이 보면 노아는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다. 게다가 정결한 동물로 구분된다는 것은 식용을 의미했다.

 

                                 깨끗하다는 것은 불순한 축복이었습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먹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결국 나무 벌레의 눈에는 하느님 조차 하찮아 보였다.

 

"하느님께서 모든 쓸어버리기기로 결정하신 것은 우리에겐 별로 놀라운 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수수께끼는 창조주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 인류라는 종을 어쨌건 보전하기로 하느님이 선택하신 일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하찮은 존재인가 하면 낫다고 뽑은 사람이 술주정뱅이에 괴물같은 성격의 노아냐는 조롱이다. 하느님이 주관하는 역사라는게 실수투성이라는게 좀벌레의 눈에도 보이는데 어찌 인간들만 못보냐고 좀벌레는 한탄한다.  스키너의 유명한 개실험에서 종을 치면 먹이가 나올 시간이라는 인지한 개가 침을 흘리는데 개의 입장에서는 내가 침을 흘리면 주인은 종을 치고 먹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는 우스갯 소리처럼 줄리언 반스는 좀벌레의 시선을 빌어 하느님의 계획을 냉소한다. 

처음에는 승선되었던 유니콘과 히포그리프는 운항 중에 살해되었다. 교배종이라는게 살해 이유였다. 방주는 동물들이 쏟아내는 배설물로 위생상태도 엉망이었다여기서 유니콘은 가상의 동물이 아니냐고 따지는 것은 의미없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역사의 시대 이전의 원역사로 구분하는 ,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도움 받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인데 줄리언 반스가 유니콘을 실재했던 동물로 취급하는 것은 흠이 아니라 창조과학자들의 공상과는 상대도 안되는 고급진 상상력이다. 성서의 상상력에 조금 첨가했을 뿐 실제로 유니콘이 존재했었다고 우기지는 않으니 말이다.  

토머스 반스가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교배종 살해에서 저자는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을 꼬집는다. 순수와 혼합, 효용과 비효용, 식용과 비식용, 정결한 동물과 더러운 동물 등처럼 모든 차별과 대립이 결국은 노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에둘러 말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한 진선미 개념은 진리(이성) 선함(윤리) 아름다움의 영역은 인식과 실천의 기본요소였다. 근세에 와서 칸트는 이것을 받아 유명한 3 비판서를 저술한다. ‘순수이성비판 이성과 인식의 문제, 진리의 문제에 천착하고실천이상비판 윤리의 문제, 선의 문제를 다루고판단력 비판에서는 아름다움을 다룬다. ‘비판이라는 제목에서 있듯이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식의 주체를 대상에서 객관으로 바꾸어 놓았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윤리를 의무의 윤리로 바꾸어 놓았다.

철학자 김상환은 이렇게 쓴다.

 

칸트 이전에는 인식의 출발점에 대상이 있고 주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비추는 거울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칸트는 인식을 주체의 능동적 종합의 산물로 보았다. 인식의 중심에는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

 

덕윤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에 의해 주도된다. 반면 의무의 윤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근본으로 한다. 윤리는 고대윤리를, 의무의 윤리는 근대 윤리를 대변한다. 윤리는 종교에 한없이 가까워지지만 의무의 윤리는 법적 추론과 유사해진다. “

(김상환, 칸트인가, book21)

 

그렇다. 나무 좀벌레가 보기에 노아는 진선미에서 덕도 없고 아름다움도 모르 사람이었다. 그는 동물들을 차별했고, 차별의 기준에는 유니콘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다하나님과 노아 사이에는 진리(의)만이 존재했는데  과연 덕과 아름다움이 빠진 진리가 존재할 있는가?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인간만이 인식 주체라는 시각이 무너진지 이미 오래인데 구조주의적으로 보는 ,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는 것은 되고 나무좀벌레의 시각으로 역사를 풀이하는 안되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지속되는 비극의 세계사는 홍수 사건이 어떤 변화나 진보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존 그레이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김승진 옮김, 이후)에서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해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며 역사에서 진보는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반스도 노아의 홍수로 인해 사람만 죽었을 뿐 변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세계 역사 5장은난파인데 반즈는 여기서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의 일부인대홍수 주목한다. 미켈란젤로 이전까지 홍수 그림에서는 노아가 주인공이고 방주가 강조되어서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에 주로 사용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에 와서 방주도 노아도 뒤로 밀려나고 물에 빠져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로 인해서 처음 각광받게 괴로워하는 헤엄치지 못하는 자의 그룹이다. 노아는 미술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화 '노아'에서 홍수 이후의 세계에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에 새생명이 탄생하자 노아는 아이를 죽이고 가족이 자살하려 한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처럼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봐야만 했던 노아의 슬픔과 분노는 그에게서 살아남아야 의미를 앗아갔기 때문이다생각을 바꿔 손녀를 살리고 온가족이 살아남기로 노아의 결정은 휴머니즘이 아니라 당신이 의롭다고 택한 노아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과연 어떤지 똑똑히 지켜 보라는하나님에 대한 저항이었다.

나무 벌레의 눈에도 홍수 사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 은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안전한 방주에 올라타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 보는 것을 구원이라고 여기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나무 좀 벌레 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노아 도대체 어떤 점에서 반기독교 영화라고 목소리들을 높였을까?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시원이 되는 창세기를 철학, 문학, 영화 등을 통해 인문학적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입니다. 전통 신학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며 독자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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