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원점에서
다시 원점에서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12.09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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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교회에서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나도 안다. 교회는 청년들을 너무 부려먹었다. 어쩌면 그렇게 부려먹는 것이 한국문화에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에서 ‘열정 페이’가 거론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교회가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곳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논쟁이다.

만일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곳이라면 ‘열정 페이’가 아니라 희생이 되더라도 그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통 교회들은 이단들보다도 못하다. 나는 통일교 교인들이 꽃을 파는 기사들을 여러 책들에서 보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정통 교회 교인들은 통일교 교인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통일교 교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주님과 교회와 다른 교인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속아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지시가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그 일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그 일을 하고 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는 이단들이 오히려 정통교회들보다 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이 지나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생각을 해보자.

나는 여호와의 증인 교회의 청년들도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 거부를 통해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 교회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다.

여호와의 증인 청년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라.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을 택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인정을 받아 옥살이를 하지 않게 되어도 군대를 가는 것보다 현저하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불이익을 감수하는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일은 반드시 청년의 자발적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린 여호와 증인 청년 교인들을 통해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 증인 교인들은 최소한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전한다는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기른다면, 그리고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 남자 그리스도인이 그의 이교도 친구 중 오직 한 사람을 확신시키고, 여자 그리스도인이 그녀의 이교도 친구 중 오직 한 사람에게 믿음의 진리에 관해 지속적으로 확신시킬 수 있다면, 그와 그녀는 처음 3세기 동안에 있었던 교회의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한 셈이다.”(앨런 크라이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 감광남 옮김, Ivp, p.221)

결국 오늘날 정통 교회 교인들이 실패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기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정통 교회 교인들이 왜 자신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기르는데 실패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피고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통 교회 교인인 부모의 믿음이 없거나 부실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믿음이 부실한데 자녀의 믿음이 건실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근본적으로 부모들의 믿음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이었던 ‘아비투스’가 없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며 그들의 믿음을 드러내는 도구였고 그들이 믿어 알게 된 말씀의 해석이었다. 초기 교회가 성장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를 통해서였다. 그들은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무분별하게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지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들의 실천과 희생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의 초점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모집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초점을 맞추었던 것은 자신들의 신실한 삶이었다. 자신들의 삶이 예수님의 방식에 익숙해지면 다른 이들이 자기들과 연합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그 일이 가능했겠는가. 바로 자신들의 자녀들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스티누스의 학생 하나가 체포되었을 때 그는 자기들을 박해하던 군대 지휘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좋은 믿음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렇다. 오늘날 청년들이 교회에서 떠나는 것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지 못하기 때문이며 부모들이 믿음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던 아비투스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오늘날 정통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던 아비투스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면 아비투스가 없는 그리스도교를 믿게 된 사람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될 수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믿음이 참임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를 보지 않고 믿게 된 믿음은 결코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신실할 수 없다. 그 신실하지 않음이 오늘날 청년들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투스가 없는 정통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자 결론이다. 무엄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나는 주님이 이미 촛대를 옮기셨다고 생각한다. 촛대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었던 아비투스다.

처음 3세기 동안에 있었던 교회의 성장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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