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첫 기독교 국가'의 기초를 놓다
도마, '첫 기독교 국가'의 기초를 놓다
  • 김기대
  • 승인 2021.12.1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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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행전 이야기(2)

엘라가발루스 로마 황제(재위218~222) 외가가 시리아로 정통 라틴계열이 아닌 최초의 황제다. 그의 외가는 시리아의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섬기던 제사장 집안이었고 역시 어린 시절 다마스커스에서 가까운 에메사에서 제사장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황제 별칭은 여기서 나왔다. 재위시 여러 난잡한 기행으로 4년만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혈통도 이런 기행을 과장하는데 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로렌스 앨마 태디마(Lawrence Alma-Tadema)의 '엘라가발루스의 장미', 19세기 후반. 엘라가발루스는 하늘에서 수천톤의 장미를 뿌려 여성노예들과 즐겼고 일부는 장미에 질식되어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로렌스 앨마 태디마(Lawrence Alma-Tadema)의 '엘라가발루스의 장미', 19세기 후반. 엘라가발루스는 하늘에서 수천톤의 장미를 뿌려 여성노예들과 즐겼고 일부는 장미에 질식되어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그가 자란 에메사는 지중해와 중국 인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엘라가발루스가 에메사 출신이라는 소문때문이었을까? 인도 사절단이 그를 만나러 로마로 가는 중에 당대 유명한 영지주의 학자였던 바르 다이산(Bar Daisan,233 사망) 만났다. 사절단은 실크를 황제에게 바쳤을 것이다. 엘라가발루스 이전의 황제들은 실크를 다른 섬유와 섞은 합성소재의 옷을 입었으나 로마 지역에서 최초로 실크로만 옷을 입은 사람이 엘라가발루스였기 때문이다(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하우스). 또한 말로만 듣던 인도 종교 대한 정보도 그들로부터 얻었다.  바르 다이산이 만난 그들은 인도의성자들로 그리스어로시르마나이오이’, 산스크리트어로 고대 브라만 종교의 사제인 슈라마나(Sramana), 사문(沙門)으로 불렸다. 초기 불교에서 사문은 불교 수행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마 행전의 기록 연대는 엘라가발루스 재위기인 220년에서 230 사이, 바르 다이산이 인도 사절단을 만난 이후로 추정할 있다. 불교, 또는 고대 인도 종교에는 영지주의와 만날 지점이 많았다.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이 있기 일부 교부들은 박해를 피해 인도를 새로운 선교지로 삼아 기독교를 전파할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도진출을 고려하는 데는 안디옥 학파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유리했다. 인도의 사절로부터 들은 인도의 신비한 소식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주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들에게 매혹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학을 신학과 접목시킨 선구자 필론과 필론의 제자인 오리게네스의 신학에는 영지주의로 보이는 내용들이 더러 드러난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라 불리는 오리게네스의 4중적 의미의 해석이나 숫자에 대한 의미 부여는 영지주의와 많은 부분 닿아 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따르면 오리게네스는 도마행전을 알고 있었다. 또한 마니교는 사도행전 대신 도마행전을 채택했기 때문에 마니교에서 개종한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마행전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마행전의 원본이 시리아어인지 그리스어인지 의견이 분분한데 시리아어 본문은 정통 교회의 가르침이 가까우며 그리스어 본문은 마니교 금욕주의자들이 그들의 교리에 맞게 개정했다고 한다외경 연구가 송혜경은 도마행전이 에데사에서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하필 에메사가 아니고 에데사에서 기록되었을까? 일설에는 다르 바이산이 도마행전의 저자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

지금의 터키 지역에 훗날 오스만 제국의 거점 도시가 되는 아나톨리아와 유럽의 초입 지역인 북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교통요지에 에데사(지금의 우르파) 있다. 에데사를 수도로 하는 오스로에네 왕국의 왕이었던 아브가르의 재위 시기는 예수의 생애와 겹친다.

병을 앓고 있던 아브가르는 예수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건너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초대를 수락하면 예수에게 자신의 지역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예수의 부활 승천으로 약속이 무산된  도마는 다대오를 에데사에 보낸다. 다대오의 능력으로 왕의 병은 나았고 왕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였다. ‘교회사 나오는 부분이다. 직접 파송된 사람은 다대오지만 그 모든 계획은 도마에게서 나왔으니 도마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하지만 예수 대신 다대오를 뽑아 파송할만한 권위가 도마에게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유세비우스가 도마를 12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소개하면서, 다대오는 70제자(72제자) 중의 하나라고 표현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가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소개되지만 도마행전에는 다대오가 12제자 명단에 없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도마를 의도적으로 소홀히 대접했으니 도마행전을 참조했을리는 없는데 두 개의 복음서에도 12제자 중 하나로 소개되는 다대오를 왜 70제자 중의 하나로 불렀는지 의문이다. 골고다로 오르는 예수가 땀을 닦으라고 건네 받은 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베로니카의 수건을 다대오가 아브가르왕에게 전해주었다는 전설도 있으나교회사 베로니카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교회사 실증주의 사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사라고 없지만 아무튼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오스로에네 왕국이 1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나라인 셈이다.

(도마의) ‘의심 해석을 필요로 하고 해석은영지 만날 밖에 없으니 도마는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인도의 사문들과 만난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도마가 1세기 부터 인도와 관계가 있었다는실증’(?) 필요했다.

그런데 도마행전 보다 100여년 뒤에 쓰여진교회사 도마행전과 달리 도마가 파르티아 지역을 배정받았다고 쓰고 있으며 인도와 도마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유세비우스는 베드로복음이나 도마복음, 또는 안드레행전과 요한행전, 그밖의 행전(그는 도마행전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당시 교부들의 글에 인용된 적이 없었다고 명토박아 둔다.  유세비우스도 도마행전의 존재를 분명 알았을 터인데 도마를 '교회사'에서 최대한 '소외'시키려는 그의 의중이  보인다. 도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지만 어쨌든 그의 이름을 도용한 위경들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유세비우스는 도마를 소외시킨 것 같다.  

'교회사'가 4세기 초반에 쓰여지고 신약정경이 4세기 후반(397 카르타고 공의회) 확정되었으니 유세비우스에게는 처음부터 외경을 구분해 안목이 있었던 것일까? 100 사이에도마행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도마행전 이야기를 쓰는 데는 다음과 같은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송혜경, 신약외경(, ), 바오로

송혜경, 영지주의, 한님성서연구소

Eusebius, The Church History, Kregel

Harold W. Attridge 옮김, The Acts of Thomas, Polebridge Press

윌리엄 번스타인 ,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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