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성 관습이라는 특징을 지닌 ‘비자유의 아비투스’
중독성 관습이라는 특징을 지닌 ‘비자유의 아비투스’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1.12.14 0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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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신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거의 보든 분들이 자신에게는 체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을 보면 성령을 체험했다는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잘 이야기하려 하지 않지만(반대인 분들도 많다) 그분들이 체험했다는 성령체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적 체험이다. 병이 나았다든지 기적적인 문제해결의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일수록 더 권위적이고 자아가 강하다.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적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스스로 자신의 성령체험을 부인하는 행위가 일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 역시 ‘아비투스’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잘못된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스티누스는 150년경 로마에서 첫 번째 호교론을 썼는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로마 제국의 비그리스도인 거주자들의 삶의 방식에 맞서는 일종의 반문화적 아비투스로 제시한다. 그는 로마인들의 삶을, 네 개의 주된 분야에서 나타나는, 중독성 관습이라는 특징을 지닌 ‘비자유의 아비투스’로 여긴다. 우리는 그가 제시한 로마의 비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간음에 의해 훼손된 성적 윤리

마술의 덫에 걸린 사교

경쟁적인 물욕에 의해 왜곡된 부와 소유

다른 관습에 대한 증오와 다른 종족에 대한 살해로 가득 찬 폭력과 혐오

이것을 읽으며 나는 로마의 비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로 열거되고 있는 이 네 가지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특성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성폭행이 일어나고 있는가. 성폭행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성폭행이 아니라 간음들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추론해볼 수 있다. 걸리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간음들은 얼마나 많을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단들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통일교의 ‘피가름’을 생각해보라. 정명석의 JMS를 생각해보라.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단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단들이란 그리스도교에 피어난 곰팡이들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청결하다면 그런 곰팡이들은 피어날 수 없다. 간음에 의한 훼손된 성적 윤리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특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래 전 나는 운전을 하고 가다 꽤 큰 시골교회를 보았다. 옆에 탄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목사님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강단에서 손으로 밀면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그분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이 성령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었다. 내 갑작스런 질문에 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신사도운동을 전면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횡행하는 성령운동이나 기적운동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초기교회의 기적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넘어지거나 웃거나 하는 일들이 어떻게 성령의 역사인가. 그것은 마술과 다르지 않다. 아니 마술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거나 자신이 넘어진 것을 성령의 체험으로 기억한다. 참으로 허무한 성령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체험은 결코 반문화적 아비투스를 형성할 수 없다.

경쟁적인 물욕에 의해 왜곡된 부와 소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오늘날 부흥하는 교회 대부분은 이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고급 차를 타고 와서 이런 차를 타고 싶으면 이곳에 헌금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제대로 씨를 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이지리아 교회 목사의 주장이나 나처럼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려면 자신의 교회에 헌금을 해야 한다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하는 미국의 교회나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고 설교하는 한국의 교회나 모두가 똑같다.

사랑의교회 앞에서 부동산을 하는 분이 내게 한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교회를 권사님들이 제일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

무슨 해설이 필요하겠는가. 오늘날 경쟁적인 물욕에 의해 왜곡된 부와 소유는 오늘날 교회의 특성이다.

마지막 증오와 폭력과 혐오 역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땅밟기 기도를 한다며 절이나 다른 종교의 사원을 돌며 찬송가를 부르는 행위,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불상을 훼손하거나 절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모두 바로 이런 행위들이 아닌가.

특히 광화문에 모이는 전광훈의 추종자들이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떠올려보라. 그들의 표정이 바로 증오와 폭력과 혐오가 아닌가. 사랑제일교회에서 던지는 화염병이나 사제 화염방사기는 폭력의 증거가 아닌가. 그들만 그런가, 오늘날 대형교회들에서 반대하는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 반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다른 관습에 대한 증오와 다른 종족에 대한 살해로 가득 찬 폭력과 혐오가 바로 오늘날 교회의 특성이라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런 특성들은 유혹적이며 강력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최선을 다해 이런 습관들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유스티누스는 그것들이 바로 마귀의 능력과 조작에 대한 표현들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아비투스를 통해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그 낡은 아비투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인의 새 아비투스는 대안적이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아비투스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은 모두 새 아비투스 안으로 들어갔다고 선포했다.

성적 절제

마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헌신

부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공동의 기금 안에 넣고 곤경에 처한 모든 이들과 나누는 것”

우리의 적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유스티누스는 이 새 아비투스가 “그분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여러분이 판단을 할 차례이다. 내가 쓴 내용이 틀리는가. 지나친 억측인가. 현실을 모르는 추론에 불과한가. 도매금으로 넘기는 단정인가.

나는 처절한 자기반성과 함께 교회를 감싸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이 로마의 비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를 옹호하는 옛 사람의 태도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날 교회의 특성이 된 아비투스가 유스티누스의 지적대로 마귀의 능력과 조작에 대한 표현들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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