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 된 목사의 딸
'간첩'이 된 목사의 딸
  • 김기대
  • 승인 2021.12.24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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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자녀 열전(2) 현미옥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헌영, 가운데 줄 오른쪽 끝이 주세죽 그 옆이 현앨리스다. 맨 뒷줄 왼쪽끝은 놀랍게도 호치민(호지명)이다. 사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많으나 정병준은 앨리스의 복장이나 나이로 미루어 1920년대 초 상하이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추정한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헌영, 가운데 줄 오른쪽 끝이 주세죽 그 옆이 현앨리스다. 맨 뒷줄 왼쪽끝은 놀랍게도 호치민(호지명)이다. 사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많으나 정병준은 앨리스의 복장이나 나이로 미루어 1920년대 초 상하이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추정한다.

 

1921 1 14 상하이에서는 한국인민단에서 개최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가 있었다. 1919 9월에 궐석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다음 12 5 상하이에 밀입국 하였고 2개월 김구가 환영회를 열어 것이다. 환영 화환을 이승만에게 바친 화동(이라기에는 나이가 많은 20 초반의 여성 ) 손진실과 현미옥이었다. 손진실은 유명한 손정도 목사의 딸이다. 손정도는 2019걸레성자 손정도라는 성탄특집 다큐멘터리가 2부작으로 KBS에서 방영되어서 친숙해진 이름이다. 김일성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손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한다. KBS다큐멘터리에서도 김일성이 고향을 떠나 멀리 길림성까지 손목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손목사는 민족주의자였지 좌익계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존경은 좌우를 초월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상하이에 오는 것을 꺼려하자 손목사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서 상하이 환영회가 성사될 있었다.

현미옥은 손정도 목사 직전에 정동교회(감리교) 담임했던 현순 목사의 딸이었다. 손목사와 달리 현목사는 민족주의자면서 좌파 계열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손정도와 현순은 같은 기독교인인 이승만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딸들이 화환전달자로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손진실과 현미옥(미국이름 앨리스 )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손진실은 친일파 윤치호의 동생 윤치창과 결혼한 낙랑클럽에서 활동했다. 낙랑클럽은 해방공간에서 친일 문인 모윤숙이 만든 고급 사교 단체였다. 게다가 총재는 역시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김활란이었다. 한국 펜클럽 회장을 지낸 전숙희는 단체를 유사매춘단체로 묘사하고 미군 정보기관 CIC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했다. 손진실은 영국공사를 맡은 윤치창을 따라 영국에서 거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 갔다.

손진실은 손정도목사의 증손녀 손정희가 영화배우 남궁원의 아들 홍정욱과 결혼해서 집안의 가계도를 설명할 때만 가끔 이름이 언급될 뿐이다.

현순 목사의 앨리스 현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주요 좌파 계열 인물로 분류될 만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여운형과 박헌영의 동시 구애를 받았다던가, 조선의 마타하리 였다던가 하는 주장이 있지만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돌베개)라는 앨리스의 전기를 정병준교수(이화여대) 따르면 근거는 희박하다. 박헌영과 앨리스는 1920년대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했지만 그것이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상하이는 좌파 독립운동가들과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의 거점이었다.이들은 스스럼없이 조우해서 민족의 미래를 의논했다. 기독교 민족운동가 이갑이 세운 오성학원의 교사로 있다가 상하이로 건너온 최창식의 호는 운정(雲丁)이었는데 운정을 따라 손정도는 입정(立丁), 현순은 석정(石丁)으로 호를 지었다. 사람 보다는 아랫 세대이지만 당시 상하이에 있던 박헌영도 이들을 따라 이정(而丁)으로 지을 정도로 이들 사이는 돈독했다. () 그리고라는 접속사이니 정에 얹혀가고 싶던 박헌영의 마음을 엿볼 있는 대목이다. 현순과 박헌영은 사회주의자, 손정도와 최창식은 민족주의자로 이들을 이어주는 것은 기독교였다. 박헌영도 승동교회를 다녔고 당시 상하이에 있던 여운형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승동교회의 조사(지금의 전도사) 있다가 1914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진학했었다.

하와이 노동자를 실어 나르던 2 이민선에 승선해서 1903 3월에 하와이에 도착한 현순 목사는 딸의 탄생을 보았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평양을 건넌 앨리스는 속지주의에 따라 시민권자가 되었다. 현목사는 하와이 카후쿠와 와이알루아 농장에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다가 1911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귀국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다. 시기 함께온 앨리스는 이화고녀(4년제 졸업생) 거쳐 이화여전에 진학했는데 졸업 기록은 없다. 3.1 운동 이후 아버지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 것이다.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하던 박헌영과 여운형이 모두 앨리스에게 구애했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가족들의 신화라고 정병준은 말한다. 여운형은 앨리스보다 나이가 17세나 많았고 박헌영은 1921 주세죽과 결혼했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앨리스는 정준과 1922 결혼해서 아들 하나 씩을 두었는데 딸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유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앨리스는 아들 웰링턴 정을 데리고 정준과 이혼한다.

다만 같은 또래(박헌영 1900년생, 앨리스1903년생) 같은 종교, 같은 이념 때문에라도 박헌영이 앨리스에게 교회 오빠같은 이미지는 충분히 줬을 가능성이 있다. 영어에 목말라 있던 박헌영은 현순과 현앨리스로부터 영어의 도움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앨리스는 노동운동,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0년대 초반부터 미군을 위해 일하게 된다. 아버지 현순이 그랬듯이 일본을 패망시키는 일이라면 미군에 협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하지만 시기에 집안에 숨겨둔 공산당 관련 문서때문에 앨리스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5 11 1 13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언어 전문가(소위 계급에 해당하는 군속들)들이 도쿄에 도착한다. 13 11명은 일본 여성이며 릴리 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앨리스 현이 한국여성이었다. 미국에서 격리수용이라는 모욕적인 처사를 당한 일본인들로서는 미국을 위해 일해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한국인 릴리 리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없고 그러면 앨리스 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해방후 한국전쟁까지 남한군에도 좌익이 많았듯이 앨리스 현도 정보수집을 위해 지원했을 수도 있고, 이미 공산당이라고 소문난 상태에서 어떤 거래의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엘리트 공산당 지도자였던 연인 이강국을 도와 미군 장교와 동거하면서 정보를 내다가 여간첩으로 처형당한 김수임과 엘리스 현의 주소는 종로구 옥인동으로 같았다. 김수임이 정말 간첩이었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많다.

시대극에서 김수임은 많이 다루어졌지만 앨리스가 최근에발굴 것은 거의 정병준 교수의 덕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1 대전 암호명 'H21' 연합군 고위장교들을 유혹, 군사기밀을 정탐해 독일군에 제공했던 일명 마타하리에 빗대어 김수임과 앨리스를 조선의 마타하리라고 부르지만 마타하리 사건에 조작 시비가 있듯이 정말 해방공간에서 여인이 간첩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시민권자인 앨리스는 코리아민간통신정보그룹(Civilian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Korea- CCIG)’에서 일하다가 1946년 미국으로 추방된다. 미군정은 앨리스를 ‘CCGIK의 임무를 파괴한 악마’로 기록했다는데 정보기관이 이런 인사기록을 어리석게 남겨 두었던 의도가 궁금하다. 다시말해 미군당국에서 북한에 보라고 내 놓은 역정보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깊게 드는 대목이다.

몇해 전 별세한 선우학원박사는 미주 지역 통일운동권의 대부였는데 그 역시 한국 전쟁 이전 체코를 거쳐 북한에 입국하려다 좌절된 적이 있다. 이 때 이경선 목사와 선우학원 박사가 박헌영과 김일성에에 보낸 편지에도 미주내 공산주의 지도자로 현앨리스가 거론되고 있었다. 선우학원 박사는 이미 미국 정보 당국의 사찰을 받고 있는 상태였는데 어떻게 이런 편지가 가능했고 또 노출되었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1995년 10월 2일자 서울신문의 ‘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사민과 현앨리스를 재미교포 부부로 소개하는데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조선 축구 대표단 선수였던 현효섭은 앨리스의 조카인데 그는 앨리스에 대해서 상반되는 진술을 한다.

 

현앨리스의 추천으로 1946년 2월 민간통신검열단에서 일했던 현효섭은 주한미군 CIC앞에서 아마도 현앨리스가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렸다는 내용의 진술을 했고, 9년이 흐른 뒤인 1955년 박헌영을 미국 스파이로 조작하는 재판 과정에서 또다시 북한 최고 검찰소의 증인으로 등장해 이번에는 현앨리리스가 미군 정보 공작기관의 중간간부였다고 증언했다. (정병준, 위의 책, 161쪽)

미국에 있던 앨리스는 1948년 또는 1949년 초에 미국을 떠나 체코를 거쳐 북한에 가려고 했다. 그 보다 앞서 아들 웰링턴은 체코에 입국했다. 모자가 함께 입국하려고 했으나 앨리스만 먼저 1949년 말 북한에 입국한다. 북한당국은 앨리스를 간첩으로 의심하고 입국을 막았으나 박헌영이 힘을 써서 박헌영과 함께 일하게 된다.

1949년이면 한국전쟁 이전 즉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몰리기 전이었고 김일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였다. 1955년 박헌영은 북한 재판부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런데 앨리스의 이름은 재판기록에 증인으로만 나오지 직접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박헌영이 사형당한 1956년 직후에 사형당했을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북한이라도 사형기록이 없지는 않을 터인데 많은 의문이 남는다.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비공개 처형’으로 의심해 볼 여지도 있지만 석연찮은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체코에 남겨둔 아들 웰링턴은 체코에서 의대(미국에서 UCLA의대를 중퇴했다)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던 그는 1963년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둔채 자살한다. 그 전까지 계속해서 북한 입국을 타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웰링턴은 그 때까지 어머니가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 역시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정병준은 앨리스를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으로 묘사하는데 앨리스 뿐만 아니라 당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 이념에 경도되었다기 보다는 ‘어느 이념’이 민족에게 유익할까를 두고 저울질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앨리스 현과 아들 웰링턴 정
앨리스 현과 아들 웰링턴 정

앨리스는 휩쓸려 갔다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뭔가를 해보려다가 북미 양측에서 모두 버림받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다가 얼핏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가 떠올랐다. 왜 그를 떠올렸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작가 정지돈은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아들 웰링턴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정병준의 이 책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나는 정지돈의 책은 읽지 않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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