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교 핵심 관계자 도마
마니교 핵심 관계자 도마
  • 김기대
  • 승인 2022.01.0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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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행전 이야기(3) - 사라진 유대계 기독교를 찾아서

마니교에서 도마행전은 성례전에도 쓰일 정도로 위상이 사도행전보다 높았다. 사도행전이 바울의 행적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마니교는 바울의 위상을 낮게 봤다는 말이 된다. 도마는 3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니고 이후 정통 교회사에서 보면 바울의 신들메를 자격도 없는 위치인데 마니교에서는 어떻게 위상이 높아졌을까?

그전에 먼저 베드로와 바울이 선교역할을 나눈 결정부터 살펴 보아야 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가 되었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끈질기게 사도의 직분을 요구했던 바울에게 베드로를 비롯한 원사도들은 뭐라도 주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이방인의 사도 둥그런 사각형처럼 형용 모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해냈고 유대계 교회는 사라졌다.

 

그래서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갈라디아 2:9)

 

바울 사상으로부터 파생된 종파들과 유대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파들이 2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생중심으로 단어를 구분한 것은 바울의 위치가 워낙 공고했던지라 바울계 이단들은 감히 바울의 권위에 도전 못했던 유사품들이었고 유대 기독교는 중심이 약해서 누구라도 그것에 필적하는 종파를 만들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때문이다.

유대 기독교계 종파 중에는 엘카사이파(Elcesaites) 있었다. 엘카사이파는 1세기 요단강 근처에서 발생해서 페르시아까지 퍼진 유대 기독교 종파였다. 페르시아에는 에스더 이후 유대교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엘카사이파의 전파가 쉬웠을 것이다. 엘카사이파는 유대 전통을 강조해서 모세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반면 바울 서신은 깍아 내렸다.

엘카사이파는 에비온파와 비슷한데 에비온파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지만 그의 신성과 처녀 탄생은 부정했다. 또한 복음서 모세를 소환하려고 가장 애썼던 마태복음을 중시하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높게 평가했으며 바울은 율법주의자로 제쳐 놨다. 사해 사본의 전승자로 알려진 쿰란 공동체의 에세네파와의 연관성도 주장된다.

위의 갈라디아서 본문처럼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바울이 보기에 베드로보다도 앞선 유대계 기독교의 중심 인물이었다. 또한 야고보는 바울에게 정결예식을 행하라고 권면도 할 위치에 있었다(행 21 : 17-26). 이방인 공동체를 이끄는 바울의 위상을 고려하면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만한 인물은 야고보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울처럼 선교 과정에서 일어난 서사가 없었다는게 야고보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유대 기독교 계열은 마사다 전투 이후 존립이 불투명해지면서 바울이 ‘포기한(?)’ 지역으로 눈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야고보 사후 리더십 공백기에 동쪽으로 선교지를 개척해 나간(나갔다는 전승을 가진) 도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러면 마니교와 도마는 어떻게 만나게 되는가?

마니(Mani216~274) 지금의 이란 땅인 파르티아 제국에서 태어났다. 유세비우스가교회사에서 도마가 선교지로 배정받았다고 하던 파르티아다. 유세비우스의 서술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파르티아에는 도마 교회 전통이 있었다. 마니의 아버지 파틱은 엘카사이파였다. 마니는 25살에 엘카사이파와 결별하면서 마니교를 창시하는데 사상 근저에 있는 엘카사이파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파르티아 태생의 마니는 도마 교회 전통에도 익숙했을 것이며 당시 유행 사조였던 영지주의와 유대-기독교 전통, 그밖에 조로아스터교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차용해 마니교가 시작되었다. 마니의 활동시기와 도마행전의 집필 시기는 3세기 초중엽으로 겹친다. 도마행전에 앞서 이미 도마복음서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마니교도들은 그 지역에서 대표적 제자로 추앙되던 도마를 사도의 원형으로 보았다. 도마행전의 저자가 마니교도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엘라가발루스 황제때 로마를 방문했던 인도의 사제인 슈라마나(사문)들을 통해 로마 제국 내 지역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중국 지역에서도 마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 마니경전의 중국어 필사본이 툰황(돈황)석굴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4세기에 파진 툰황석굴은 20세기 들어 발굴되면서 알려진 중국의 최대 도서관이었다. 여기서 발견된 불경들은 마치 쿰란문서처럼 돈황불교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 안에 마니경전이 있었으니 마니교의 전파력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발견된 10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마니교의 소명받은 자들'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발견된 10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마니교의 소명받은 자들'

 

다시 도마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도마는 ‘쌍둥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낸다. 마니는 예수와 200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만 일종의 ‘영적‘ 쌍둥이였던 것이다. 예수와 마니를 쌍둥이로 이어주는 존재는 요한복음 14:26의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였다. 마니교에서는 예수와 마니를 보혜사로 본다. 예수 도마 마니는 이렇게 만나게 된다.

 

따라서 마니교는 본인들이 의도했건 안했건간에 예루살렘의 유대계 기독교 전통을 일부 계승한다. 뿐만아니라 마니교를 ‘배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보다도 ‘정통’의 입장에서 영지주의를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위일체 논쟁, 양성론 논쟁에서 밀린 세력들에게도 기댈 문서는 도마계 문서밖에 없었다. 이렇게 도마는 마니교뿐 아니라 유대계 기독교, 교리 논쟁에서 밀린 4세기 종파의 대표 사도가 되었다.

 

유대계 기독교는 도마를 매개로 동진(東進)만 했을까?

동쪽으로 간 도마를 대신해서 우리는 유대계 기독교와 얽힌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다.

야콥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신학’(조효원 옮김,그린비)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다루는 아랍 수기들을 통해 이 공동체들이 10세기까지 존속해 있었다는 증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말하자면 이 사실은 이슬람의 전사(前史)를 획기적으로 뒤집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는 유대교적 전통과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함께 내버린 게 아니라 비상한 머리로 이것들을 뒤섞었고 또 뭔가를 새롭게 창안한 게 아니라 너무나 정확하게 유대인 그리스도교 전통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그것을 코란으로 재탄생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58쪽)

 

사도바울은 다마스커스 회심 사건 이후 아라비아에서 수행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선교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아라비아로 이주한(또는 살고 있던) 유대인 신자들은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교회를 힘들게 유지하다가 결국 이슬람에 흡수되고 만다. 이슬람에 흡수되지 않은 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 공동체에서도 배척당하고 바울의 신학 위에 세워진 가톨릭으로부터도 개종 압력을 받는 상태에서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10세기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형태를 유지했다고 하니 놀라운 생존력이다.

야콥 타우베스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사라진 쉽스(Schoeps)라는 유대교 종파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들은 유대교 가톨릭 양쪽에서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가슴에 십자가 문신을 한 상태로 그들의 신앙을 유지했다. 제도교회는 없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십자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일본의 가톨릭 박해기에 불교도로 위장해서 앞에는 불상이지만 뒤에는 성모 마리아나 십자가가 새겨진 불상을 지니고 있던 ‘잠복 기리시단’ 같은 조직이 유럽에도 있었다는 말이다. 잠복기리시단이 ‘박해’를 피해서 그들의 신앙을 숨겼다면 쉽스는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성 교회의 ‘오해’를 피해서 십자가를 감추었다.

도마행전을 따라가다 보면 이처럼 도마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베드로가 맡기로 했던 유대 기독교인들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도마행전 이야기를 쓰는 데는 다음과 같은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송혜경, 신약외경(상, 하), 바오로 딸

송혜경, 영지주의, 한님성서연구소

Eusebius, The Church History, Kregel

Harold W. Attridge 옮김, The Acts of Thomas, Polebridge Press

윌리엄 번스타인 ,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하우스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 신학, 그린비

 

글쓴이는 로스앤젤레스 소재 평화의 교회 목사로 있으며 인문학 모임인 평화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감독도 모르는 영화 속 종교 이야기(모시는 사람들)',  '교회는 언제쯤 너그러워질까(삼인)', '예배당 옆 영화관(동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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