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look up.
Don't look up.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1.08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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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look up."을 보았다. 몇몇 페친들이 글에서 추천한 영화다.

메릴 스트립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SNL 작가 출신의 코미디와 정치 드라마를 기막하게 잘 만드는 애덤 맥케이 감독의 작품이다. 메릴 스트립(대통령)이 그런 배역을 맞다니 정말 웃겼다. 디카프리오(천문학 박사)도 망가지기는 마찬가지다. 제니퍼 로렌스(박사과정 학생)도 망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코미디의 본질은 망가지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망가지는 모습도 허술하지 않다. 매우 현실적(실증적)이라서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천문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한 학생이 혜성을 하나 발견한다. 궤도를 계산해보니 6개월 후에 지구와 충돌한다. 이 사실을 알리려하지만 모두들 믿지 않는다. 그것을 대통령에게 말했지만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보기관들 역시 그 사실을 국가기밀로 만들어 버릴 뿐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지만 언론 역시 그것을 흥미로운 기사거리로 여길 뿐 심각한 주제로 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과학자들까지 우리로 치면 지방대 출신의 박사인 디카프리오를 무시한다. 방송앵커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 역시 돈과 섹스를 전부로 아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실 방송앵커뿐만이 아니라 대통령까지 모든 사람이 돈과 섹스의 노예임을 영화는 강조한다.

대통령을 좌우하는 것은 대통령의 자금줄인 자본가이다. 그 자본가의 생각으로 혜성을 파괴할 작전을 세우지만 결국 그 계획은 실패로 끝난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어떻게 사람들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감시하고 있는지 역시 현대의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해낸다.

결국 그 모든 것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저마다의 입장에서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변하는지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지구의 마지막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가운데 임한다. 혜성과의 충돌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언제나 동일하다.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예언자의 외침은 언제나 그렇게 무력해진다.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실감나는 영화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개임을 실감했다. 나는 영화를 보고 오늘의 그리스도교를 떠올렸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오늘도 곳곳에서 세습은 이루어지고 성폭행은 이루어진다. 헌금유용과 목사들의 사치는 더 이상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이러니 교회가 오히려 인간성을 말살하고 정상적인 삶을 왜곡해도 그런 건 아예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니 나는 내가 매일 쓰는 글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Don't look up."을 외친다. 그러니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무리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외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마디로 나는 영화를 보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다. 한동안 사람들은 내 글을 읽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진다. 결국 내가 지르는 소리는 세상의 소음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Don't look up."
눈을 들어 하늘ㄹ 

결국 이 두 소리 가운데 "Don't look up."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영화는 실감나게 보여준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순간 그냥 모든 것이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돈과 섹스에 탐닉하며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결국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눈과 귀는 더욱 가려질 뿐이다. 그것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욕망의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 난 내 소감은 암울함이다. 정말 암담하다. 희망이 없다. 세상은 그처럼 막강하다. 인간은 돈과 섹스를 통제할 힘과 능력과 의도 자체가 없다. 그래서 권력이 공중권세가 되어 세상을 장악한다.

새삼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영적 전투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무력감이 밀려든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리 소리 질러도 사람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의 고개는 이미 땅을 향해 고착되었다.

아킬레 로시가 말하는 것처럼 경제에 관한 우리의 의식구조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 금융화, 다국적 시장, 성장 이데올로기와 같은 신화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의 결정권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비가시적 신화들이다.

작금의 대선주자들이 호소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비가시적 신화들이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변함없이 이러한 신화들로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해온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 대한 거절이며 저항이다. 그러나 단순한 거절과 저항이 아니라 대안이다. 여기서 대안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러나 그 대안은 실제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물론 복음이 말하는 대안은 하나님 나라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 대안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 본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편이 되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지원자들이 본 것이 바로 이 대안인 하나님 나라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 락틴티우스 역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그가 자신과 공동체를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동체가 보여준 것이 하나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는 아주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 즉 함께 ‘하늘의 길’을 걷는 ‘모든 성별, 인종, 연령에 속한 사람들’을 한데 모은다. 그들과 함께 그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것, 포로들을 속량하는 것, 고아와 과부들을 부양하는 것, 그리고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배웠다. 그들과 함께 그는 원치 않는 아기를 낙태하거나 유기하고 전장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성급한 행위를 포함한 모든 폭력과 살인을 거부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서두르지 않는 법을 배웠다.”(p.71)

초기교회는 그 자체로 세상의 대안이었다. 외부인들은 그것을 보고 그 대안이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이 보고 들어온 것은 단순히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그러나 초기교회는 그렇게 다가온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을 양 팔을 벌려 환영하지 않았다. 초기교회는 “이교식 생활 방식에서 빠져나오는 초보 신자들의 인식의 습관과 판단 기준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바꾸는 것”(p.235)을 목표로 삼고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이 그렇게 바뀔 때까지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교식 생활 방식에서 빠져나오는 초보 신자들의 인식의 습관과 판단 기준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바꾸는 것”은 이제까지 그들을 장악하고 있던 세상의 비가시적 신화들을 불식시키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의 과정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 훈련의 과정이다. 이 훈련의 과정을 회복하지 않는 한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려도 그들은 "Don't look up."을 주장하는 세상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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