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
몸으로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1.09 01: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제 얼굴에 마스크 팩을 했습니다. 어딜 놀러 가면 아이들 성화에 한 번씩 하던 일입니다. 오늘 손자의 돌잔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팩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팩은 물론 얼굴에 로션도 바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정말 달라졌습니다. 늙은 것입니다. 얼굴에 검버섯도 여기저기 생기고 주름도 골이 깊어졌습니다. 살색은 검어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뼈마디가 쑤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 갑자기 무릎이 시큰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더운 곳에 닿는 제 몸은 알러지가 생깁니다. 그러면 가려워집니다. 그래서 연고를 바르곤 했습니다. 스테로이드제를 발라야 약간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려움증의 원인이 피부가 건조하기 때문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보습효과가 좋은 바디로션을 발라보았습니다. 연고보다 효과가 좋았습니다. 결국 가려움증도 노화로 인한 피부건조가 원인이었나 봅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보다 분명한 사실은 없습니다. 늙는 것처럼 서러운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체는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재산을 모두 잃고 집에서 쫓겨날 때 두 가지를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책읽기와 운동입니다. 책읽기는 당연히 목사로서의 책무입니다. 책읽기가 목사의 순교라는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책을 읽었습니다. 나중에는 도서관에서 읽을 책이 사라졌습니다. 신간을 모아놓은 자리에 기독교 서적이 들어오면 대부분 제 차지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기사에서 좋은 책이 눈에 들어오면 그것을 사는 것 역시 오래도록 지녀온 습관이었습니다.

운동은 주님이 언제라도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늙어버렸으니 헛일이 되었습니다. 이젠 예전처럼 몸이 가볍지 않습니다. 운동량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운동을 피하게 됩니다. 적은 운동으로도 몸이 피곤해지고 관절이 시큰거리니 무의식적으로 운동을 회피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두 가지 습관은 제게 큰 유익이 있었습니다. 독서는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고 운동은 육적으로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두 가지가 뒤집어졌습니다. 독서보다 운동이 더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 말씀은 늙은 사람의 변이나 넋두리일까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말씀을 달리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속사람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영적인 성숙이라고 받아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겉사람이 늙어갈 때 다시 말해 몸이 늙어갈 때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몸이 젊고 튼튼할 때 우리가 육적으로 방황하기 쉽거나 영적 집중이 어렵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관록이 붙은 것입니다. 비록 힘이 없어지고 불편해지지만 몸이 체득한 아비투스가 강화되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저는 성서 자체가 몸의 사용설명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이 말씀도 잘못 이해하거나 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아야 발견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제물이란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해 죽어야, 다시 말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삶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위해 사는 삶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여미는 동작 하나도 수행의 결과라고 합니다. 신발을 벗어놓는 행위도 수행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손동작 하나, 표정 하나, 그리고 숨 쉬는 것까지 모두가 달라져야 합니다. 같은 동작처럼 보여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몸의 숨 쉬기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숨 쉬기와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거칠어지거나 빨라지지 않는 숨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제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저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드려야 하는 거룩한 산 제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떻게 참된 예언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하는 것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감동적인 말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처럼 행동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디다케>는 ‘거짓 예언자들과 참된 예언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구별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모든 위선을 미워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던 공동체 안에서 기독교적 권위의 척도는 신실한 삶이었다. ‘진리를 가르치되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모든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다.’”(p.237)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목사를 좋은 목사라고 생각합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이 좋은 교회이고 그런 교회의 목사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주변에 작은 교회들이 있는데 큰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가요.(예수님의 비능력) 정당한 경쟁이 당연한 것인가요.(경쟁이 없는 하나님 나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요,(형제애의 실종)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가를 어찌 모를 수 있는지요.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 나라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셔서 가장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장 가난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사는 목사를 비참하게 여기고 하찮게 여깁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떨어진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몸으로 드려야 하는 거룩한 산 제물이 그리스도인이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라는 사실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상이 반사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괴리된 시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의 이비투스와 그리스도인 개인의 아비투스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상이 반사적인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실증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몸의 노화는 이 일과 상관이 없습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제가 되도록 저의 무의식적인 행동까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아비투스가 되도록 경성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몸으로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