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회 정의, 우리가 이루어 가겠습니다
[번역] 사회 정의, 우리가 이루어 가겠습니다
  • Danny Lee
  • 승인 2007.06.23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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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와 ‘펜트코스트 2007’

대부분의 가치 있는 시도들이 그렇듯 교회의 몇몇 친구들과 시작한 ‘책모임’도 한 가지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모임은 ‘사회 정의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분명히 제시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기독 단체이자 출판사인 <소저너스>를 만들고 현재 편집장을 역임하고 있는 짐 월리스 목사의 책 <God's Politics>(하나님의 정치)를 읽기 위해 시작되었다.

단순히 그런 마음과 정신을 지니기 위해 느슨한 책임감으로 시작되었던 이 모임이 ‘펜트코스트 2007’ 행사로 우리를 이끄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워싱턴 D.C에서 <소저너스>가 주관한 펜트코스트 2007은 빈곤 문제를 국가적 의제의 최전선에 둠으로써 이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고자 결의하는 목사·활동가·학생·정치가 들이 대거 참석했다. 놀랍게도 우리 ‘책모임’의 친구들은 각자 따로 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등록했고, 나중에서야 우리가 같은 행사에 모두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신앙과 교회의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닫고자 갈구하는 공통된 바람이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마음 깊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리라. 

언제부터 예수가 공화당 편이었나?

최고 지도자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이 연루된 성 추문, 사적인 믿음을 이 땅의 법으로 만들어 강제적으로 행사하려는 금욕주의적 냉혹함을 지닌 기독교 우파, 그리고 대다수가 부정한 전쟁으로 여기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면서 추문과 속임수와 고문의 증거로 일그러진 소위 ‘기독교인’ 대통령. 이 모든 것들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불신이 온 나라에 흩뿌려지고 과장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온 짐 월리스의 책은 신선할 뿐만 아니라 미국 기독교가 어떻게 정확히 양분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예언자적인 음성과도 같았다.

월리스는 사랑과 정의에 한 뿌리를 두고, 더욱 정확히는 복음의 예언자적 사명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고, 신앙과 정치의 통합에 대한 대안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그는 기독교 우파의 극단적인 관점에서 다시 신앙을 되찾아 올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기독교 우파가 기독교 신앙을 낙태와 동성결혼이라는 두 가지 협소한 문제로 쉽사리 정리해버리고는 이 두 사회적 논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을 근거로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려는 행태를 비난했다. 이런 의제를 공론으로 내세우는 정치적 힘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의제 자체는 복음의 기본적인 의미에서 빗겨나고, 비종교적이고 전통적인 공화당의 가치와 유사한 것과 뭉뚱그려지게 되었다. 언제부터 예수가 선제공격에 의한 전쟁과 부자들의 세금 삭감, 사회보장제도의 사유화와 사형 제도의 주창자가 되었단 말인가?

정치가가 아니라 정책을 지지해야

다른 한편으로 예수는 민주당원도 아니다. 놀랍게도 민주당은 중요한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정책에 붙들려 있는 바람에 그 가치 있는 의제가 지닐 수 있는 도덕적 역동성을 상실하여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월리스에 따르면, 신앙은 당파적인 충성심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정책을 지지하되 정치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특정한 후보나 당을 지지하기보다, 각각의 사안에 대한 복음적인 의제를 지지하도록 정치가들을 강제해내는 운동을 조직화해야 한다. 그는 인종차별의 부정의를 뿌리 뽑고 실질적인 제도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교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가장 훌륭한 예로 시민 권리 운동을 들었다. 이 운동은 1964년 공민권법과 1965년의 투표권법이 서명되게 함으로써 그 기념비적 성취를 이뤘다. 기독교 우파 운동은 무효한 것으로 입증된 하향식 전략인 법적인 강제를 통해 집단적인 도덕적 양심을 형성하려고 하는 반면, 시민 권리 운동은 집단적인 도덕적 양심을 형성하여 법에 변화를 일으켜낸 것이다.  

따라서 국가 세입 정책에서부터 외교정책, 빈곤 문제에서 환경문제, 낙태에서 사형제까지 전 영역을 아우르는 모든 사안들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알려내야 한다. 그리고 각 정책의 이점을 분별하는데 있어 복음에 명시된 도덕적 진리를 그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월리스는 누가복음 4장의 구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회합의 문을 열었다. 여기서 예수는 월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의 첫 공적 언급인 사명 선언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예수의 핵심 목표이며 주문과 같이 되풀이되는 그의 기도 제목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과 도시의 교회들은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 눈먼 자와 눌린 자들을 위한 대변자로 행동하고 있는가?

과연 교회가 ‘가장 작은 자’를 위한 대변자인가?

미국에서는 개인적인 경건과 사적인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신앙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를 행하는 공적 사역으로(아마도 개인적 신앙은 이 공적 사역으로 완수될 것이다. 야고보서 2:14-26) 전환시켜야 하는 중요성을 축소시켜왔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와 만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사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분이 아닙니다”라고 월리스는 말할 것이다. 프레디 해인즈(Freddie Haynes) 목사는 아모스 24장에 대해 설교하면서 “당신의 수직적 관계는 수평적 결과를 낳아야만 합니다.… 개인이 성취하는 의로움이란 사회적 정의 안에서 스스로를 증거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무엘 로드라게즈(Samuel Rodriguez) 목사도 “정의란 의로움이 (사회에) 적용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본질적으로 이 설교가들은 모두 서민 대중의 차원과 정책 차원 모두에서 공적 사역을 행하는 것을 통해 개인적인 신앙을 확증시켜야 할 소명을 명시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거리의 최전선에서, 그리고 정책이 결정되는 의회당의 최전선에서 부정의에 맞서고 ‘가장 작은 자’를 대변해야 한다.

해외 선교를 가고 솔선해서 자선을 행하는 것을 보면 교회는 진실로 배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교회가 사회와 그 모든 부와 권력 제도에 참여해서 빈곤과 압제를 존속시키는 부당한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지만 진정 가치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자원을 쏟아 붓는 것이, 희망 없는 세상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인들로 하여금 이성을 압도하는 혁명적인 사랑을 지니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교회를 통해 진리를 목격하게 할 수 있는 더 큰 증거를 확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성직자들의 전략적 동맹’(Clergy Strategic Alliances)의 의장인 로멀 튠(Romal Tune) 목사는 시민 참여 목회를 위해 목사들과 교회들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그는 '당연한 관대함'(just genorosity)과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구별했다. 전자는 압제받는 이들이 겪는 결과를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후자는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압제 제도와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감옥을 방문하거나 감옥에서 성경공부를 주관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죄수들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어떻게 교회가 그러한 감옥 제도와 사법 제도, 그리고 교육 제도, 부정의의 그물망으로 얽힌 모든 여타 제도들을 개혁하기 위해 조직화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어느 거리에서 행진을 해야 하며 어느 지도자들에게 간청해야 할 것인가?

변화 가능성 목격한 우리…사명과 실천 열망으로 가득차 

친구들과 나는 우리나라의 의사당에서 장로파, 침례파, 메노나이트파, 감리교파, 오순절파 등이 종파적 차이를 돌파하고 각자의 이웃과 지역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토론하고 명확히 밝히며 궁극적으로 법 제정으로까지 나아가는 것과 같이 분명한 소명 가운데 모두 하나가 되는 운동이 움트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역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매우 명확하고 확신에 찬 부름에 응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소명은 정의와 정책이 생산되는 장으로 신속히 스며들어서 정치가들조차도 신앙과 빈곤 문제에 대해 말하고 투표하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했다. 

아마도 이 운동에서 가장 분명하게 지목되고 있는 ‘종착지’는 이 회의 주요 행사로 <소저너스>와 CNN이 공동 주관한 후보 토론회였을 것이다. 세 명의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자들인 존 에드워드와 바락 오바마,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생방송에 나와서 향후 10년 간 빈곤을 반으로 줄이기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날 국회의사당인 캐피털 힐에서 행진과 집회를 마쳤을 때, 하원 의장인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목사는 이 회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했다. “정치가가 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공무에 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도둑떼나 다름없다.” 이렇게 교회는 사회에 참여하며 정치가들로 하여금 복음적 의제를 지지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세계에 실제적인 변화를 강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목격한 친구들과 나는 이에 고무되어 사명과 실천의 열망을 지닌 채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우리는 어떻게 이 사명을 우리 교회와 지역사회에 실현해낼 수 있을까? 우리는 매주 만나 그 사명을 더욱 구체화하고 우리 교회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목회를 시작할 계획을 세우기로 먼저 약속했다. 그러나 새로이 발견된 사명과 더불어, 이 회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교회와 지역의 목회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더 진척시키기에 앞서 다음 몇 달 동안 답해야 하는 몇 가지 어려운 물음들을 부여안게 되었다.

우리 앞에 던져진 물음들

각 교회는 신앙 고백문을 가진다. 우리의 실천 선언문은 어떤 것인가? 각 교회는 예산을 가진다. 우리의 예산은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의 사명 선언문을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내부의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우리는 먹임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 교회의 재정은 이웃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구성되어 있는가? 아니면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무심한 채 단지 편안한 도시 근교 기독교 공동체를 제도화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는가? 집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환영받는 존재인가?

이런 질문들은 보다 더 기초적인 질문들이지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 지역사회의 역사는 어떠한가? 우리 지역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는 누구인가? 교회로서 행하는 우리의 활동의 어느 정도를 시간과 자원을 쏟아 붓는데 할애해야 하며, 우리의 가장 가까운 지역사회, 즉 먼 해외의 빈민가가 아니라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이 아니라면 우리와 같은 소재지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보로(borough)에서, 우리 보로도 아니라면 우리 이웃 보로에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 지역의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보인 사랑으로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교회라는 것은 알고나 있는가? 아니면 일요일 아침마다 교통이 복잡한 거리를 막고 서서 시끄럽게만 하는 존재들은 아닌가?

왜 말씀은 감동을 상실했는가? 설교대에서 누가 설교를 하든 왜 사람들의 신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저마다 실패하는가? 개인적인 경건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통찰력 있는 신학적 말들이 잠시 동안은 우리의 영을 높이 솟구치게 하는데도 왜 우리는 금방 자기만족과 의심으로 다시 가라앉아서 ‘이런 기독교적인 것이 실제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지고 앉아 있는 것일까? 말씀은 금방 공허한 말이 되고 만다. 심오한 영적 진리는 판에 박힌 진부한 말이 되고 만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가난한 자를 먹이고 벌거벗은 자를 입히고 세상에서 정의를 구하라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실천하는 데 게을렀던 것이다. 말씀은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강화되며, 실천만이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실천이 부재하면 말씀은 더 이상 단단히 땅에 박히지 못한다.

문제는 실천없는 믿음

우리는 어려운 사안을 다루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우리의 이웃에서부터 그저 관계를 맺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면, 그들의 필요를 알게 될 것이고, 일단 그들의 필요를 알게 되면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설교하는 말씀, 우리가 이미 마음 깊이에서 알고 있는 그것, 매주마다 교회를 드나들며 듣는 그 말씀이 마침내 살아 움직이게 되고 다른 이를 먹임을 통해 우리 자신이 먹임을 받게 될 것이다.

가장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회의 특권을 부여 받았으며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의무이다.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블(Bill Hybels)의 아내인 린 하이블(Lynn Hybels)은 “더 많이 축복받을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이웃이 알고 있고, 그들이 사랑하는 교회라면 믿지 않는 자들을 끌어들이려고 환상적인 최첨단 시설로 무장한 복음전도 운동에 그토록 매달려야 하겠는가? 우리가 실천했다면 그 행동이 이미 많은 것을 말했을 것이고 그들을 교회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찾기만 하면 그곳에 있다

다음 세대가 직면하는 과제는 동질의 복합 거대 교회를 짓는 것이 아니며,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마는 더 많은 교회를 짓는 것도 아니다. 다음 세대의 과제는 사회 참여가 편리하게 선택되거나 단명하고 마는 자선적인 기부 행위나 짧은 해외 선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압제받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고 만남을 통해서 이미 존재하는 교회들을 지역사회에 혁명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찾기만 하면 그곳에 있다. 우리 마을이 아니면 옆 마을에서라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의무적으로 강요받지 않아도 우리는 훨씬 더 많은 힘을 쏟으며 우리 이웃의 압제를 초래하고 영속시키는 제도적인 부정의를 해결해나가려 애쓸 수 있다. 21세기의 교회가 가난한 자와 함께 살며 부정의를 증오했던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진실로 교회는 자신의 공간을 채워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참으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 자리 수를 채울 걱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참여 후기가 끝맺는 지점은 바로 이 사명과 실천이 하나가 되는 지점, 언제나 가장 타협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다. 왜냐하면 이후 일어날 일은 앞으로 증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명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명을 달성하기까지의 길은 그만큼 분명하지 못하다. 곳곳에 난관과 실수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가 지적했듯, 우리는 그분이 심지어 우리의 약함과 단점을 통해서, 아니 오히려 특별히 바로 그 약함을 통해 우리의 사명을 실현하시기까지 우리는 그 사명이 불러일으키는 영감 가운데 붙들려 살아야 한다.

* 글 / 대니 리 (뉴욕중부교회 영어예배부 리더이며, Dart Mouth University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 번역 / 최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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