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크릭에 묻혀버린 살육의 역사
샌드크릭에 묻혀버린 살육의 역사
  • 박지호
  • 승인 2011.04.08 00:0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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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인디언 학살 현장을 가다(1) 샌드크릭

▲ 샌드크릭으로 가는 길. 국립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20분 가까이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했다. ⓒ 미주뉴스앤조이
미국 인디언 역사는 멸망사(滅亡史)와 맥을 같이한다. 드넓은 대지를 누비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언들은 군대와 함께 들이닥친 백인들의 억압과 탐욕 앞에 사그라졌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남동쪽으로 12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샌드크릭(Sand creek). 그곳은 운디드니(Wounded knee), 와시타리버(Washita River)와 함께 인디언의 멸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3대 학살 현장 중 한 곳이다.

콜로라도 에즈란 시골 마을에서 차로 한 시간을 더 달리자 시빙턴(Chivington)이라는 푯말이 샌드크릭에 가까웠음을 알렸다. 시빙턴이란 마을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20분을 더 달리자 현장에 닿았다.

▲ 샌드크릭 학살 현장 입구에는 시빙턴이란 표지판이 서 있다.  ⓒ 미주뉴스앤조이
샌드크릭 학살 현장(Sand Creek Massacre National Historic Site)은 사유지란 명목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어왔다. 사건 이후 142년 만인 2007년에야 '전쟁터(battlefield)'에서 '학살 현장(Massacre Site)'으로 바꿔 일반인에 공개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유적지와 달리 입구에 다다라서야 푯말이 나왔다. 어렵사리 찾았지만 도로 입구에는 현장이 폐쇄됐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도대체 몇 마일을 달려 이곳에 왔는데' 하며 부아가 일었다. 안내 번호로 전화했더니 폐쇄 문구를 무시하라는 허탈한 대답이 돌아왔다. 웬만한 사람은 가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돌려버릴 상황이다.

▲ 샌드크릭 전투 현장이란 이름의 비석 뒤로 나무가 있는 지역이 학살 현장. ⓒ 미주뉴스앤조이
작은 산봉우리조차 없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말굽같이 생긴 메마른 샛강이 나지막한 둔덕을 만들었다. 그곳이 샤이엔 부족(Cheyenne people)과 아라파호(Arapahoe people)이 비극을 당한 현장이다. 제대로 된 표식이 없어 일반인은 현장을 대충 짐작해야 할 정도로 안내 설명이 불친절하다.

학살 현장을 방문한 날,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어댔다. 일일 방문객은 고작 10명 남짓. 기자가 찾은 시간에는 단 1명만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어 두리번거리다 먼저 와 있던 방문객에게 도움을 구했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에 쥔 책을 펴들더니,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 고고학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현장을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 미주뉴스앤조이
다행히 그 방문객은 고고학자였다. 특별한 만남 덕에 그 넓은 평원에서 학살 현장을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진짜 학살 현장은 '샌드크릭 전투 현장(Sand creek battlefield)'이란 비석이 있는 곳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145년 전의 총성과 비명소리가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날 샌드크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864년 11월 29일 새벽, 샌드크릭에 머무르던 샤이엔 부족 전사들이 사냥을 나가 있을 때 미군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몇 안 되는 남자들은 무기를 가지러 천막 안으로 달려갔다. 그 상황에서도 추장인 검은주전자는 미군이 약속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치며 미국기와 백기가 달린 기둥을 붙들고 섰다. 수백 명의 여자와 아이들은 검은주전자의 깃발로 몰려들었지만 미군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

▲ 추장 중 한 명이었던 흰영양은 공격을 막기 위해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시빙턴 대령에게 걸어갔지만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흰영양은 죽기 전에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오래 살아남은 것은 없다. 이 땅과 산뿐." 미군들은 죽은 흰영양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귀를 자르고, 머리를 으깼다.
… 남자들은 부녀자와 어린이들 둘러싼 채 보호하려 했다. 한 둑 밑에는 부녀자 다섯이 웅크리고 있었다. 미군이 다가가자 여자라는 걸 알리기 위해 몸을 드러내고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미군은 그 여자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다. 또 한 여인이 포탄에 다리가 박살난 채 둑 위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는데 미군 하나가 군도를 빼어들어 몸을 보호하려 들어 올린 여자의 팔을 내리쳤다. 그 여자는 한 바퀴 곤두박질쳤고, 다시 하나 남은 팔을 휘저으며 애걸했다. 그자는 남은 팔마저 잘라버렸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차별 살육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한 구덩이에는 삼사십 명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여섯 살 정도의 어린 소녀에게 막대기에 묶은 백기를 들려 보냈다. 그 소녀는 몇 발짝도 가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었다. 결국 그 여인들도 구덩이 속에서 몰살당했고 밖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네댓 명의 남자들도 죽음을 당했다. 내가 본 죽은 사람들 모두 머리가죽이 벗겨져 있었으며 한 임신한 여자는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태아가 옆구리에 놓여 있었다. 흰영양의 시체는 성기가 잘려 있었다. 나는 한 미군이 그걸 가지고 담배 쌈지를 만들겠다는 것을 들었다. 성기가 잘려진 여자도 있었다. 다섯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모래더미 속에 숨어 있었는데 미군 둘이 그 아이를 찾아내어 권총을 쏘고 팔을 잡고 모래 더미 속에서 끄집어냈다. 수많은 아이들이 엄마 팔에 매달린 채 죽어 나자빠졌다." (당시 학살을 목격했던 로버트 벤트의 증언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중에서)

샌드크릭 학살은 미국의 제7기병대가 샤이엔 부족 거주지인 샌드크릭을 급습해 132명의 인디언을 살육한 사건이다. 그중 3분의 2가 부녀자와 어린이었다. 미군이 샤이엔족 추장과 맺었던 안전 보장 서약을 어기고 저지른 범죄였다.

▲ 샌드크릭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후손이 부모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탓인지 학살 현장은 더욱 고요했다. 바람소리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만 휘파람처럼 들릴 뿐이다. 사람 소리에 놀란 야생 사슴 떼가 놀라 이리저리 도망쳤다. 참혹했던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고목나무만 말없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함께 갔던 고고학자가 현장에서 발굴된 총탄과 샤이엔족의 유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부끄럽고 가슴 아픈 역사"라고 중얼거렸다.

▲ 현장에서 발굴된 총탄들.
당시 원주민을 학살했던 기병대를 이끌었던 시빙턴 대령은 감리교 목사였다. 한때 광산촌에서 주일학교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그는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모으고, 마을을 피바다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군인으로 변신했다.

'싸우는 목사'로 유명했던 시빙턴 대령에게 인디언을 죽이는 일은 신앙의 연장선이었다. 당시 안전 보장 서약을 어기는 일이라며 공격을 반대하던 미군 장교에게 시빙턴 대령은 "나는 인디언을 죽이러 왔어. 인디언을 죽이는 일이라면 하나님나라에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옳아"라고 말했다. 힘들게 일구어 놓았던 평화는, 목사이면서 군인이었던 시빙턴에 의해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학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제임스 코너 중위는 "이런 잔학한 행위가 시빙턴이 모르는 가운데 범해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가 그런 행위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연합감리교회가 지난 1996년, 시빙턴 대령의 만행을 공식적으로 참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점이다. 인디언 선교사인 안맹호 목사에 따르면 굉장한 내부 진통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인디언 후예인 앨빈 디어 목사의 노력으로 얻은 성과다. 사건 이후 132년 만이다. 감리교의 사죄 고백에 샤이엔 족도 감리교 총회에 부족 대표를 파견해 화답했다. 감리교는 2008년 총회에서 샌드크릭 학살 현장을 위한 기금으로 5만 불을 책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샌드크릭에서 자행된 학살의 아픔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오늘날까지 샤이엔 족 인디언은 어릴 때 어머니의 무릎에서 학살의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안맹호 목사는 "자녀에게 당시의 만행을 이야기해주는 어머니는 만행의 주범이 백인 목사였음을 잊지 않고 말해준다"고 말했다.

▲ 현장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 또 다시 시빙턴이란 표지판을 마주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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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i99.com 2011-05-07 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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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11-04-16 21:23:42
野史라는 이름속에 감추어진 正史, 우월주의, 신앙우월주의, 백인 우원주의(색깔), 우월주의라는 부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거짓 진리의 횡포: 십자군 전쟁, 거짓 종교의 횡포: 종교재판, 거짓종교의 선교라는 횡포: 남미인디언 학살 개혁주의 철학을 오용한 정치의 횡포: 흑백분리정책

아벨리안 2011-04-11 12:07:44
너무나 가슴아픈 이야기이네요..
저도 기회가 되면 그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