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파괴와 소외가 창궐한 세상, 교회의 대안은?
폭력과 파괴와 소외가 창궐한 세상, 교회의 대안은?
  • 신광은
  • 승인 2011.04.09 09: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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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아나뱁티스트에게서 배우자(IX) 인간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역할

▲ 이미 인류는 지구를 열 네 번이나 완전히 파괴하고도 남을 만한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인류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고도 남을 만한 그런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오늘날 인간 삶이 직면하는 거대한 위기는 너무도 거대하고, 심각하여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것에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아마 ‘인간의 위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유사-인간(pseudo human)’ 종족의 출현을 보고 있다. 영화, <서로게이트>가 보여주듯 거리에는 진짜 인간은 자취를 감추고 인간처럼 생긴 낯선 존재들만이 서성대고 있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 그들은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거대한 매트릭스에 의해 기꺼이 사육되기를 선택한 가련한 노예들이다.

인간종이 멸종하고 새로운 종의 인간, 곧 포스트 휴먼(post-human)이 등장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다운 인간이 사라져버렸으니 포스트-휴먼 사회(post-human society)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Jose Cordeiro)나 도미니크 바뱅(Dominique Babin)은 나노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 테크놀로지 등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진짜로 죽지 않고 영생하는 포스트-휴먼(Post Human)이 조만간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다니지만, 이는 사실 인간이 종말할 때가 가까이 왔다는 선고나 다름없다.

인간종의 멸종과 함께 역사가 끝났다. 이런 점에서 자끄 엘륄은 20세기 이후 인간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고 했다. 역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엘륄은 국가-기술 복합체라는 거대한 매트릭스가 역사로부터 창조성과 신기성을 제거해 버리고, 역사를 하나의 기술적 프로세스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탈역사 시대(post-historical era)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현대적 삶의 위기

아담의 범죄 이후 어느 시대나 문제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는 새로운 문제 앞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아주 독특한 문제이다.

지난 달 일본 동부 해안을 강타한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케 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자연 못지않게 인간 문명의 파괴력도 얼마나 큰지를 절감케 하고 있다. 자연의 파괴력과 인간 문명의 파괴력 중 누가 더 큰지 내기라도 하는 양상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궁금해진다. 과연 이번 일본 대지진에서 진짜 위험한 것은 자연인가, 인간인가?

학자들에 따르면, 이미 인류는 지구를 열 네 번이나 완전히 파괴하고도 남을 만한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는 물론이고 자신이 사는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고도 남을 만한 그런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 역사상 그 어떤 제국도 이만한 힘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현대인은 그런 힘을 가졌다. 이제 인류는 최초로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 인간이 감당하기에 그것은 너무도 큰 결정권이다. 하여튼 우리는 지금 ‘핵시대’라고 하는 대단히 특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핵 기술은 단순히 하나의 기술이 아니다. 핵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이다. 우리는 먼저 핵 개발로부터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발견한다. 왜 인간은 핵을 개발한 것일까? 욕심 때문이다. 기필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혹은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국으로 하여금 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무한정 전기를 쓰기 위해서, 그리고 엄청난 떼돈을 벌기 위해서 인간은 핵을 개발했다. 그리고 인류는 1945년 이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렸다. 이러한 핵 개발의 열정을 우리는 무한한 부의 추구와 무한한 경제 성장의 추구에서도 비슷하게 발견할 수 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저 무한한 욕망을 보라. 그 욕망이 지구를 삼키고, 우리 인간과 우리의 삶을 삼켜 버렸다.

핵 개발의 배후에 존재하는 욕망은 놀라울 정도로 종교적이다. 잘 아는 얘기겠지만, 인간이 핵 개발에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는 힘에 대한 추구 때문이다. 핵은 힘(power)의 동의어다. 쇠락해 가는 북한이 핵을 보유하기 위해서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 이유도 핵이 제공하는 힘 때문이다. 핵만 있으면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소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인의 힘에 대한 무제한적 욕망은 그 옛날 바벨탑을 쌓아 신과 겨루려고 했던 니므롯과 그의 백성들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이 잘 지적한 대로 핵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상징물이다. 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은 하늘을 향하는 탑을 쌓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는 반역과 도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핵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신성과 종교성의 아우라가 서려있는 반역의 바벨탑이며, 현대인은 그 거대한 바벨탑 역사에 동원된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핵 기술만 반역적인 것이 아니다. 자끄 엘륄이 잘 분석하고 있듯이 현대 기술 자체가 반역적이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옛날 장인들의 기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대의 기술은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을 원천 봉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추방하며, 세상을 철저하게 인간의 통제 하에 두려는 시도다. 뭔가 목표로 하는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기술의 목적이다. 따라서 기술 사회는 기도(prayer)가 불가능한 사회다. 현대인은 기도가 아니라 기술로써 구하는 모든 것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인간의 지배와 통제가 절정에 달한 지점에서 그 기술로부터 소외된다. 현대 기술은 인간의 주체적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최적 조건(the optimum condition),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최적 조건은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가 찾아낸다. 인간은 결정할 필요가 없고, 다만 수행할 뿐이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기에 결정할 수 없고, 결정할 수 없기에 통제할 수도, 지배할 수도 없어진다. 오직 기술이 홀로 지배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점차 기술의 노예가 된다.

핵 개발과 함께 주목할 만한 현상은 국민국가의 부상이다. 핵 기술과 같은 거대 기술(mega technology)의 개발 권한은 국가가 독점한다. 핵은 국가의 힘의 비정상적 비대화를 잘 보여주는 증거다. 현대 국가는 필요 없이 강력해졌다. 19세기 이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국민국가(Nation-State)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실체가 되었다. 본래 국가는 하나님께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 지상에 세우신 기관이다. 하지만 국가는 언제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요한이 말했듯이 국가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되고 만다. 오늘날 국가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주장하며 국민들의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스스로를 드높이고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고자 한다. 국가는 점차 선과 악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국민 모두의 삶을 책임지겠노라며 허풍을 치고 있다. 불행히도 국민들은 이러한 국가를 뿌듯해하며 국가에 대한 의존도와 기대치를 점점 더 높이고 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의존은 결국 자신의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가와 핵, 이 둘의 결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톨스토이(Leo N. Tolstoi)가 잘 지적했듯이 국가는 폭력이다. 그 국가가 핵을 가졌으니 폭력의 극대화가 일어난다. 핵 시대는 폭력의 시대다. 핵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핵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는 파괴자를 볼 수도 없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밝은 버섯구름과 남은 폐허뿐이다. 핵이 방출하는 죽음의 광선과 재와 공기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병들고, 왜곡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과 파괴는 수만 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핵은 영원한 폭력과 죽음과 파괴의 상징이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그 핵을 두발로 딛고, 또 핵과 핵이 만들어주는 지붕 아래에서 위험스러운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 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기막히게 잘 보여주듯 핵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분명 얼빠진 인간들임이 분명하다.

핵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소외(alineation)에 대한 훌륭한 유비이기도 하다. ‘핵가족’이라는 표현 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 사회는 모든 개인과 집단이 원자화된 사회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이러한 현대 사회의 질병을 ‘소외(alineation)’라는 말로 잘 표현한바 있는데, 오늘날 현대인은 그가 잘 지적한 대로 만연해 있는 소외로 고통 받고 있다. 불행히도 소외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으며, 점점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은 하나님과의 소외는 물론이고, 자신과의 소외, 이웃과의 소외, 자연과의 소외 등 모든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는 소외로 고통하고 있다.

관계는 단절되고,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으며, 생태계는 위협받고, 인류 문명은 큰 위기로 치닫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얄팍한 상품과 문명의 장난감,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혐오스러운 물질적 부, 대중매체가 주는 천박한 쾌락과 선전 등에 의해 양심은 마비되고 있으며, 의식은 신화와 허위의식에 빠져 깨어날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대의 문명은 하나님을 내쫓은 세속적 문명이요, 모든 인간과의 관계를 추상적인 계약의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게셀샤프트(Gesellschaft)요, 자연을 착취하는 폭력적 문명이다. 교황 바오로 2세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 ‘죽음의 문화’가 온 땅을 덮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끔찍한 종말적 상황에 처해 있는 가련한 인간을 향해서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교회는 현대 문명의 가장 큰 소비자요, 수혜자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세상에 폭력과 파괴와 소외 현상이 만연해 있지만 교회 안에도 똑같이 폭력과 파괴와 소외가 창궐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현대 교회를 볼 때마다 세상과 교회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고 실망하고 있다. 교회는 점점 맛을 잃은 소금 신세가 되고 있다.

현대병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

한국 사회는 지난 100여 년간 너무도 빠르게 현대화되고 산업화되었다. 약 100여 년 전 한국은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불렸다. 하지만 일본과 서구 열강에 의한 강제 개화, 일제의 35년간의 식민통치, 전국토를 초토화한 6.25전쟁, 그리고 광범위한 산업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버렸다. 21세기 초, 한국에서 100여 년 전 옛 조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로 인해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가 겪고 있는 현대병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여기 저기 문제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고 있다.

아마도 지금 한국은 반만년 역사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그 풍요로 맞바꾸어 버린 듯싶다. WTO체제의 개막과 신자유주의의 유입 덕택에 지금 한국인은 유치원생까지 무한경쟁의 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살인적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 사회는 점점 삭막해가고 있다. 입시난, 취업난, 주택난 등에 찌들린 한국의 청년들에게 푸르른 이상을 품는 것은 이제 사치가 되어버렸다. 한국 최고의 인재들의 산실인 KAIST에서 징벌적 등록금 때문에 연달아 죽음을 택하는 아까운 청년들이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바쁘다,’ ‘정신없다,’ ‘힘들다,’ ‘피곤하다.’ 이것이 평범한 한국인의 입에서 버릇처럼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다.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한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쓸쓸하게 혼자 죽어갔다는 뉴스 보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죽어가는 죽음을 가리켜 소위 ‘고독사’라고 한다. 고독사는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급증과 함께 점차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비좁은 원룸에 달랑 혼자 살아가는 1인 가구의 숫자가 자그마치 400만 가구나 된다고 한다. 이는 전체 가구 수의 약 1/4에 달하는 수치며, 특히 20대 청년 중 절반 이상이 1인 가구라고 한다. 이러한 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21세기 현대 한국인을 괴롭히는 가장 큰 영혼의 질병은 고독이라는 사실이다.

고독은 1인 가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2인 이상 다인 가구의 경우라도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어린이, ‘외톨이 증후군’을 앓는 청소년, 성적과 취업 때문에 고통 받는 학생, 대화 없이 지내는 쇼윈도우 커플, 주말 부부, 기러기 가족 등, 소외와 고독은 이제 현대 한국인이 겪는 국민병이 되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 사회 내의 대립과 갈등도 점차 첨예해 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남과 북이 늘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전라도와 경상도 간의 지역감정, 정치적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 기업과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강남과 강북, 기성세대와 젊은이 세대 등의 갈등도 점차 심화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탈북자, 중국 동포, 이주 외국인의 증가와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점차 문화 간의 대립과 갈등도 생겨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너무나 쉽게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작년에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한국전쟁은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심성 속에 폭력성을 깊숙이 각인해 주었다. 군사문화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징이 되었으며, 그 덕에 우리 사회는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초, 중, 고등학교에 만연해 있는 학교폭력은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하고 있다.

불행히도 한국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질병을 치유할 만한 치료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는 해체되고, 유교는 사회적 규범 노릇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대안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슬프게도 한국 교회 역시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신구교를 합하여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대안적 사회규범 및 질서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한국 교회는 이렇게 소외로 고통 받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전도 대상자나 잠재적 교인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전도(?)해서 자기네 교회로 끌어와서 교인 숫자만 늘릴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교세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명예를 드높이고, 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짓는 데 교인들의 헌금을 낭비하고 있는 데, 이런 한국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다.

아나뱁티스트의 대안 사회의 비전

실로 인간의 위기다. 여기저기서 위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는 세상에 어떤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 사회가 듣고자 하는 복음은 아마도 ‘참 인간으로 사는 삶’을 제시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면 노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대안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

아나뱁티스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대안 사회(counter society)에 대한 비전이 아닐까 싶다. 아나뱁티스트는 교회와 세상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이러한 분리 때문에 종종 아나뱁티스트는 이원론자요, 분리주의자, 혹은 분파주의자라는 오명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한국에서 아나뱁티스트를 통상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재세례파’다. 그런데 이 용어에는 아나뱁티스트를 주류 교회의 일원으로 보기보다는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분파, 혹은 종파(sect)로 보려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의 원인 중 하나는 아나뱁티스트가 교회와 세상을 칼처럼 날카롭게 구분하는 데에 있다.

아나뱁티스트가 교회와 세상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이유는 교회를 참 신자의 공동체로 보기 때문이다.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신자로 이루어진 교회가 불신자로 이루어진 세상과 구별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후터라이트 장로 클라우스 펠빙거(Claus Felbinger)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이방인처럼 사는 사람은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교회는 교회고, 세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언제나 세상이었으며, 앞으로도 세상일 것이다. 세상은 세상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군으로 섬기고 충성하는 새이스라엘이다. 그런 교회가 세상과 같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종 개혁주의자들은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문화 변혁에 대한 부르심을 역설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서 세상에 대한 책임, 문화변혁에 대한 부르심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더의 말처럼, 사회에 대한 최상의 전략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다! 신자가 신자답고, 교회가 교회다울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을 온전히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아나뱁티스트의 생각이다. 교회가 세상과 똑같으면서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섬긴단 말인가.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섬기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들은 교회와 세상을 날카롭게 분리하며,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끄 엘륄은 말하기를, 현대의 국가-기술 복합체가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최고의 윤리는 ‘순응주의(conformism)’라고 했다. 즉 현대의 국가-기술 복합체는 국가 권위에 순복하고, 기술 사회의 효율성의 원리를 따르고,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는 인간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맹랑한 꿈을 꾸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던가? 세상은 한없이 순진하기만 한 그런 크리스천에 의해서 변화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비순응주의(non-conformism)이다. 거대한 매트릭스 체제 내에서 동화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비순응주의자들 만큼 세상이 두려워하는 이들도 없다. 아나뱁티스트는 지난 500년 동안 이러한 비순응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해 왔다. 후터라이트나 아미쉬와 같은 비순응주의적 삶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다.

아나뱁티스트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나라의 정부가 칼이나 창, 총을 전혀 들지 않는 한없이 유약하기만 한 아나뱁티스트를 혐오하고 두려워했던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두려움은 대통령 하야 운동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J 목사나 한기총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위협을 만들어 냈다. 세상에 끝내 동화되지 않고 대안 사회로 존재하는 교회, 이것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교회의 사회 전략이 아닐까 싶다.

▲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문화를 고집하는 아미시의 일상의 보여주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아나뱁티스트의 대안 문화

대안 사회로서의 교회는 대안 문화(counter culture)를 창출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종종 아나뱁티스트의 제자도의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것 때문에 놀라곤 한다. 이들이 제자도의 수준을 높이 잡은 이유는 먼저 주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설교를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는 데, 그것은 아나뱁티스트의 급진적 제자도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윤리’라고 본다는 점이다. 혼자서는 지키기 힘들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는 훨씬 쉽다. 산상설교의 준수도 가능하다! 즉 이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세상의 유혹을 최소화하고,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보다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을 제공하는 장이다. 다른 말로, 교회는 세상에 대한 대안적/대항적 문화(counter culture)를 담지하는 공동체다.

2007년 미국 니켈마인의 아미쉬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때, 미국 사회와 전 세계는 아나뱁티스트의 위대한 용서와 사랑의 능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피해를 당한 아미쉬 가족과 공동체는 가해자인 찰스 로버트(Charles Robert)의 유가족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며, 사랑의 사귐의 관계로 초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꾸준하게 화해와 용서를 배우고 훈련하여, 생활화했기 때문이었다. 아나뱁티스트가 보기에 교회는 용서와 화해를 생활화하고, 그것이 문화로 정착된 공동체라야 한다.

아나뱁티스트의 용서와 화해의 실천은 공동체 내부의 갈등뿐만 아니라 공동체 밖의 갈등하는 당사자를 중재하는 탁월한 평화 중재 기술을 개발해 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의 평화 조정 기법이 사법체계 내에서도 활용 가능함을 증명해 냈다. 그래서 뉴질랜드와 같은 국가에서는 아나뱁티스트의 평화 조정 절차를 사법체계 내에서 수용하여 적용하고 있다. 이들은 갈등 당사자들 사이에 들어가서 응보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이루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조정을 통해서 세상을 치유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과 같은 이들은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 등지에 들어가서 탁월한 분쟁 해결의 열매를 맺고 있다. 이들의 신앙과 실천은 분명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를 섬기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으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평화 공동체라는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들 사이에도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아나뱁티스트는 역사적 평화 교회였다. 폭력, 전쟁, 무기, 군대의 거부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삶의 표지다. 그리고 이들의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실천은 지금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폭력과 파괴에 대한 치료책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교회는 또한 ‘형제 사랑’의 공동체다. 사랑 없는 세상 가운데서 사랑을 얻기 위해 기갈한 영혼들을 위해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스스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믿으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먼저 사랑이 실재하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은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의 가시적 표지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로마의 주교좌와 바티칸 궁, 교황, 질서 정연한 성직자 서열, 장엄한 제의와 예배 장면, 예배당 등이 보이는가? 아니다. 보이는 교회는 사랑이 보이는 교회다.

데이빗 옥스버거(David Augsburger)는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의 결정적인 특징은 '이웃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나뱁티스트의 영성은 자신의 내면적 영성(1차원적 영성)이나 초월자 하나님과의 관계의 영성(2차원적 영성)을 넘어서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의 영성(3차원적 영성)이다. 이웃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기 싫고, 껄끄러운 ‘그/그녀’와 공동체를 이루며 관계를 만들어 가는 영성이다. 그것은 또한 인종과 민족, 국가, 문화, 언어, 신분과 지위를 초월하는 형제자매 공동체를 이루는 영성을 말한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공동체 밖으로 내치지 않는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의 열매가 코이노니아(koinonia)다.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고독으로 몸부림치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랑의 샘물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힘과 부의 무한한 추구에 대해서도 아나뱁티스트는 대안적 영성을 제공해 준다. 이들의 영성은 요즘 유행하는 ‘내려놓음’의 영성이다. 이들은 서구의 개인주의를 세속적 정신으로 본다.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근대적 주체는 죄성의 표현일 뿐이다. 개인은 공동체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성서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한다. 결국 성서가 중심이다. 그래서 아미쉬 공동체의 경우 공동체의 규율인 오르드눙(Ordnung)을 어기는 자는 치리를 받는다. 회심이란 자신의 주관이나 고집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포함하며, 이로써 데무트(Demut), 곧 순종과 순명을 생활화한다. 이러한 순종과 순명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신뢰로 나아가며, 이러한 신뢰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버리는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 곧 안도, 헌신, 위탁, 방하(放下), 곧 ‘내려놓음’의 영성으로 나아간다.

또한 성공, 성장, 경쟁으로 만물이 피곤하고 지쳐 있는 세상 한복판에서 아나뱁티스트는 쉼과 안식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쉼과 안식을 강조한다고 해서 아나뱁티스트는 일과 노동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일과 노동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명령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과 함께 안식을 강조한다. 또한 이들의 노동은 자신의 업적과 성취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예배요, 섬김이요, 누림의 수단임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따라서 타인과 경쟁하여 자신의 업적 쌓기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다하기 위한 노동을 추구한다. 아나뱁티스트는 탁월한 업적을 쌓아 인간 이상이 되려는 시도도, 부족한 능력 때문에 열등한 인간 취급을 하는 것도 모두 거부한다. 인간은 다만 언제나 인간이어야 하며, 인간으로서 일하고, 쉬고, 누리기를 힘쓴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아미쉬 공동체의 기술 문명의 거부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전기와 전화를 거부하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다니며, 단추 달린 옷을 입지 않고, 보험, 사회보장제도, 군입대 등을 거부하며, 18세기 농촌 생활을 유지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옛 농촌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성과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술 문명을 선별적으로 수용한다. 즉 문명의 장난감 때문에 공동체가 해체되고, 인간성이 말살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바깥세상과 관계 맺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긴장이 우리가 볼 때는 종종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대안 공동체를 유지하고,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도전, 변화, 제도 등을 공동체 회의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결정해 나가는 노력을 진지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후터라이트의 경우 그들은 아직도 사유재산을 거부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부(富)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의 사유화는 악이라고 본다. 부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소유며, 또한 공동체의 소유며, 또한 가난한 자의 소유라는 신념을 야콥 후터 이후 줄곧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이윤 추구에 함몰되지 않으며, 무한한 경제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는 일을 하지 않으며, 가진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거나, 자신의 부 때문에 스스로 교만하거나, 타인을 무시하거나, 지배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사유재산이 없으니 말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후터라이트를 보았다면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이미 500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후터라이트의 대안적 공동체는 현대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가공할 만한 비인간화 현상을 막아내고 있다.

인간의 자율성을 선언하면서 등장한 현대 문명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켜버렸다. 현대인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만두어 버렸으며, 점차 삶을 사는 법(living a life)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실로 인간의 위기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복음은 참 인간으로 사는 법이다. 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법을 말하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사는 법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21세기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서 선포해야 할 복음이리라.

신광은 / 열음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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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i99.com 2011-05-07 19: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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