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묘호렌게쿄와 함께 떠난 티나 터너를 추모하며
남묘호렌게쿄와 함께 떠난 티나 터너를 추모하며
  • 김기대
  • 승인 2023.05.27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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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는 주고 기독교는 주지 못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창가학회로부터 받은 위로를 교회는 왜 주지 못했을까? 몇 개월 동안 나의 SNS 티나 터너(Tina Turner) 동영상이 자주 추천되었다. 내가 팝송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고 그의 이름을 검색한 적도 없는데 의외의 추천이었다. 클릭해보고는 금새 빠져들었다. 특히 젊은 시절 부른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에서 보여주는 힘이 넘치는 춤은 나를 압도했다. 그렇게 열심히 보는 중에 어느새 추천이 끊겼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다. 일부러 찾아 정도는 아니었기에 잊고 있었는데 그의 부고기사를 마주했다. 기사의 제목은 대체로 일치했다. ‘로큰롤의 여왕’으로 불리며 197080년대를 풍미한 스타 티나 터너 향년 83세로 별세.

티나 터너 50주년 기념 콘서트,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티나 터너 50주년 기념 콘서트,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주요 통신사의 보도를 종합하면 오랜 투병을 하던 그는 스위스 취리히 근처 퀴스나흐트에 있는 자택에서 5 24일(현지 시간)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티나 터너는 그래미상 통산 12 수상을 비롯해 음반 판매 1 5천만장 기록을 갖고 있다. 카린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터너의 부고에 대해 “믿을 없을 정도로 슬픈 소식”이라며 “그를 사랑한 공동체와 음악산업에 막대한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티나 터너(본명 ‘애나 메이 불럭’) 1939 11 26 테네시주 넛부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플로이드 불럭은 지역 농장 노동자였다. 가난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무살 나이에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이미 음악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아이크 터너를 만나 그의 소개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코러스를 맡았는데 어느 리드 싱어가 녹음에 나타나지 않자 티나가 임시로 녹음 것이 그를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인도했다.

아이크와 티나는 1962 결혼하면서 대부분의 곡은 Ike and Tina 발표되었다.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아이크는 가스라이팅에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었다. 폭력이 심해지자 티나는 도망가서 숨어있을 정도로 아이크의 집착이 심했다. 마침내 1976 이혼에 ‘성공’했다.

이혼 아이크의 도움 없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솔로 가수로도 성공했다. 1985 독일 음악계 거물 에르빈 바흐를 만난 1988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고, 바흐와 결혼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국적이 됐다.

로큰롤의 여왕 별세라는 부고 기사 제목에 하나 등장하는 단어는 창가학회(Soka Gakkai). LA Times 비롯한 주요 언론은 그가 창가학회 신도였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창가학회란 13세기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일련(日蓮, 니치렌)으로 부터 시작된 일련정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본의 신흥불교다.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상당한 교세를 가졌으며 미국에는 소카 가카이 대학이 평화학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귀에 익숙한 ‘남묘호렌게쿄’가 창가학회의 발원문이다. ‘남(=나무, 南無)’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 ‘나마스(namas), 또는 ‘나모(namo) 음역(音譯) 것으로 ‘귀의(歸依)한다’, ‘귀명(歸命)한다’는 뜻이다. 남묘호렌게쿄는 ‘묘호렌게쿄(佛性)’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 부모가 다른 지역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티나는 종교적(침례교)으로 엄격하고 신실했던 친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2 대전이 끝난 헤어졌던 가족이 모여 살면서 티나는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번째 남편 아이크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아이크는 난데 없이 1994 유대교로 개종했다. 2001 HBO 다큐멘타리가 이를 증명했다. 공식적은 개종은 1994년이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이 지속될 때도 아이크의 목에는 다윗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고 티나는 기억했다.

친가의 엄격한 침례교 신앙에다가 폭력남편이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이혼한 티나에게는 족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크의 폭력이 극심해지던 1973년부터 창가학회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임종을 맞은 스위스 자택 인근에 티나는 개인 불당을 가지고 있었다. 티나는 ‘불교와 기독교의 기도를 넘어서서Beyond: Buddhist and Christian Prayers’라는 CD 제작했고, 2020년에는 영적 회고록 ‘행복이 당신이 된다(Happiness becomes you)’를 출판했다.

책의 공동저자인 타로 골드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티나가 창가학회에 귀의하게 것은 아이크가 스튜디오에 데려언 발레리 비숍(Valerie Bishop)이라는 여성 때문이었다. 비숍은 창가학회 신도였고, 잦은 폭력으로 자신감을 잃은 상태의 티나에게 창가학회를 소개했다. 아이크는 병주고 약주고 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창가학회 가르침은 티나에게 다시 노래할 있는 용기를 주었고 때문에 이혼까지 결심할 있었다.

LA Times '침례교도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던 데서 남묘호렌게쿄를 암송하게 되었다'라고 티나의 변신을 소개했다. LA Times 티나의 부고 소식에 '당신으로 인해 불교를 알게 됐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라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고 있으며 평화운동에도 많은 기여를 하는 창가학회를 보도했다. 

티나에게 기독교 신앙은 불행과 폭력의 기억만을 남겼다. HBO다큐에서 그는 “남묘호렌게쿄를 더 많이 독송(讀誦) 수록 정신적으로 해방된다”고 밝혔다.

창가학회의 도움으로 편하게 가실 있었으니 안도의 마음으로 추모합니다. 그대의 종교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나는 알수 없지만 당신과 창가학회의 관계를 다룬 부고 기사로터 기독교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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