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나를 부인하면서
날마다 나를 부인하면서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0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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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렵다. 그러나 단순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내게 요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나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에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모든 행위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내린 결정이나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고를 지녀야 한다. 나는 언제나 틀릴 수 있고, 모든 것은 가변적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근본적으로 과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제 내게 옳다고 여겨졌던 것이 오늘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더 나은 방식을 생각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신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나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나는 내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반대의 길을 갈 수도 있고, 모순된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앤했던 나의 '자기'는 나를 다시 지배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 부인은 일회적인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일상이다.

내가 과거에 옳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옳지 않음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언제든 틀릴 수 있고, 주님은 그것을 언제든 지적하실 수 있다. 주님이 그것을 지적해주시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은혜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부인한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견해에 절대성을 부여하게 된다. 사실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면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도자가 가르침에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설사 상대방이 자신을 잘못 인도한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거기에 편승할 수 있는 것이 신뢰이고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든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틀린 길을 갈 수도 있다. 그것을 바로잡아주시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런 우리를 다시 바로잡아주신다. 그렇게 신앙의 길은 비틀거리며 가는 길이며 갈지자를 그리거나 우왕좌왕하며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똑바른 길을 가기를 원한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변경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런 우리의 관성 때문이다.

나는 대형교회 앞에서 물밀 듯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불쌍하게 보였다. 그 사실은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하는 곳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도 그런 그들과 다르지 않은 오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런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물론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를 떠나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떠나지 못하는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그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나는 최근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미웠다. 그런 교회들이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런 교회를 떠나라고 외치는 것이 내 사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교회들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와 다른 것,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에 위반되는 것들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미워하거나 무시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잘못된 것임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그들이 말을 듣지 않아도 나는 계속해서 외쳐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모세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고,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는 기도를 드렸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형제들이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는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었다.

그런데 나는 그냥 미워하기만 하고 그런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상이 된 교회지만 그들이 바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내가 그들을 배제하고 있었다. 배제와 차별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배제를 내 습관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냥 떠나지 않고 내게 욕을 하거나 나에게 모욕을 주기도 했다. 더구나 내가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접근금지 조치를 취했다. 사실 접근금지는 생각보다 더 마음을 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욕을 하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미움의 표시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섭섭했고, 그런 그들의 단절을 오히려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로 인해 실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나는 그런 그들을 미워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스스로 떠났으니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해야 하는 책임이 생긴 것이다.

늦게라도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이고, 그들이 허락한다면 기꺼이 교제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제도권교회에 가서 설교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 결심을 철회한다. 나는 언제라도 내게 기회를 주면 단절이 되더라도 교회에 가서 열과 성의를 다해 설교할 것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게 접근금지를 신청한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놓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언제라도 나를 찾으면 나는 그들을 기꺼이 맞을 것이다. 그것이 용서이고 그것이 사랑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바꿔야 할 태도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도 모르게 거만해졌다는 징표이다. 나는 언제라도 비굴하게 내 도도함을 꺾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옳기 때문에 더 그래야 한다. 아니 내가 옳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 외침이 나의 외침이 되기를 바란다. 이 외침에 담겨 있는 겸손함을 배우기를 바란다. 죽는 날까지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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