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주장의 장점과 단점
도올 주장의 장점과 단점
  • 김회권
  • 승인 2007.07.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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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기독교 및 성서 이해 담론 자세히 읽기 6

전체 결론

우선 필자는 도올의 입장과 견해를 비판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그의 두 책이 보여주는 대체적인 장점들을 요약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도올은 한국의 경건한 개신교 보수주의적 신자들이 주교들의 회의가 결정한 것을 성서처럼 믿어버리는 로마 가톨릭 교도들의 태도를 버리고, 성서적 증언에 집중할 것과 교회사적인 맥락, 역사적 맥락에서 포착되는 역사적 사실(事實)과 본문의 증언이 제시하는 문학적·문헌적·문맥적 사실(事實)에 주목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대체로 도올은 이 두 책에서 기독교의 이방선교·정경화·4복음서의 형성, 그리고 교권과 속권의 결탁과 제휴의 과정,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 복음 수용사 등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관련된 세부 사항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만한 학자적 성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도올의 문체는 적확하며 화려하다. 잃어버린 한자어들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아름다운 한자 숙어 및 한자어체 한국어(비정·힐구·논구·한우충동·단장취의 등 숱한 예가 발견)를 복구하여 학문적 용어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동양학적 지평, 한국사적 지평과 성서적 지평의 병렬적인 이해, 그리고 세계사에 대한 통합적인 섭렵(涉獵) 안에서 기독교를 정위(定位)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세부적인 논란 유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입체적인 역사 이해를 돕고 있으며, 기독교 복음의 세계사적 사명에 대한 재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을 준다.

셋째, 도올의 성서 이해와 요한복음 이해, 특히 구약과 신약의 과격한 단절은 치우친 면이 있으나, 그가 기독교 복음이 얼마나 새로운 문화 창조의 힘이며 역사 변혁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인가를 강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참신한 면을 드러낸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도올의 두 책은 적지 않은 파문들을 불러일으킬 쟁점들을 현란하게 빠른 속도로 쏟아내는 다발성 기관총의 총구 같다. 도올의 두 책은 그동안 축적된 역사비평적인 성서 연구의 성과들을 교회사적인 맥락 안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는 보통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쳐지는 논의들을 대중적인 필치로 재생시키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역사적 예수와 초대 기독교의 단절,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단절과 차이,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와 콘스탄틴 이후의 황제 기독교의 차이,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 등은 서구 신학대학원에서나 국내의 몇몇 신학대학원에서는 자유롭게 가르쳐지고 수용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모든 보수주의적 신학 교수들도 이런 논의들을 익히 알고 있으나 신자들에게 전면적으로 이 쟁점들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세부적인 역사적 문헌사적 지식들이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개신교 신자들의 신덕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도올의 가히 도발적이고 참신한 글들에서 개안(開眼)과 혼돈을 동시에 경험하겠으나, 도올이 제시하는 그런 관점의 성서 이해, 기독교 신앙 이해를 바탕으로 삼는 교회들이 영적인 감화력(특히 교회 중심의 기독교 성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도올의 주장들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도올 식의 성서 이해, 기독교 신앙 이해가 이론적으로 더 맞을지도 모르고 옳을지도 모르나, 그런 신학이나 성서 이해를 가지고는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일선 목회자들의 판단은 도올의 주장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도올의 성경 및 기독교 해석은 정경화의 멍에에서 벗어난 성서 이해, 기독교 이해이다. 그는 마음으로는 정통 교설에 머물기를 원하나 그의 지성과 지적인 시좌는 정통주의의 제방을 쉼 없이 범람한다. 그는 인간의 자유 지성의 활동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고착된 권위, 절대화된 규범에 대하여 탈경전적인 자유를 원한다.

따라서 도올은 367년 이전의 전(前) 경전화 시기의 지적 개방성과 혼융성을 더욱 더 원래적인 종교, 기독교의 표지라고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그토록 원하였으며, 복음의 절대 자유를 만끽하기를 원하였다.

도올의 마르시온 선호, 아리우스 선호, 서방교회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로마서와 마태복음 대신에 동방교회의 복음서인 요한복음 선호 등은 경전화가 주는 절대화의 규범에 대한 인문학적 경계심의 발로였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는 인문학 정신은 규범 안에 있으되 규범 너머에 있는 미지의 자유를 향하여 그리워하는 불꽃같은 열정이다. 도올에게는 이런 인문학적 열정이 깃들어 있다. 그가 기독교와 성서에 대하여 내린 판단들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는 인문학을 개척하는 지성적인 허기와 새로운 시야와 관점 획득을 위한 부단한 실험을 즐기는 정신이다.

도올이 기독교와 성서에 대하여 내린 판단들의 사실성 여부는 더 정교한 논의로 밝혀져야 하겠지만, 그가 줄기차게 이미 확정된 권위로 여겨지던 정경에 대하여 품는 질문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일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올의 성서와 기독교 이해와 관련된 담론들에 성실한 반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도올의 성서 및 기독교 담론의 특징을 정리하되 간단한 평가를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도올의 역사 재구성 부분은 전반적으로 치열하고 견실하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 인지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둘째, 도올의 탈경전적인 기독교 이해는 건전한 신앙 실천을 통해 자기검증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서는 용인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그함마디의 영지주의 서책들과 가르침들이 실천의 장에 옮겨졌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뤄질 때 탈경전적 기독교 이해가 정(正)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도올의 구약 이해는 매우 소박하고 단선적이다. 따라서 구약의 가치와 무게를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는 도올의 평소의 학자적 객관성과 치열성은 사라지고 객기와 흥분이 앞선다. 도올이 폐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약의 율법은 결코 간단한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 레위기의 제사법과 의식법, 그리고 시민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 이미 많은 구약 율법들은 발전적인 해체를 경험하였다.

도올이 율법을 지칭할 때마다 그것이 단지 신약에 와서 발전적으로 해체된 제례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구원사를 통틀어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남발함으로써 학자적인 균형 감각을 다소 잃고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등 구약 예언자들이나 시편 그리고 모세오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죄와 불순종하면서 스스로 상처 입으시고 인간의 폭력 사정권에서 박해받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몰트만, 카발라 신학의 하나님 고난 신비주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요한복음은 도올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은밀하고 의미 깊게 구약성경과 대화하고 있다. 거의 모든 장들마다 구약 암시, 참조, 인증, 본문 상호적인 지시가 발견될 수 있다. 영지주의적 구속자 신앙이 아니라도 말씀이신 예수의 행적을 이사야 55:10-11, 잠언 3, 8장의 지혜 기독론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다섯째, 신약 성서 27서 정경화는 우연한 요소들의 조합들과 상호 작용의 결과 발생했다 하더라도, 이제 그 정경들은 2,000년간의 검증과 시험을 거친 정경들이다. 367년의 그 갓 선택된 정경들이 아니라 2,000년의 세월 속에서 정경적인 기능을 스스로 입증해 낸 책들이다.

여섯째, 신구약 통일성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갖는 책들이 신약정경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마지막 단계에 구속함으로써 인류 구원사를 마무리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 계획을 이해하는 데 큰 유익을 준다(롬 11:25-26).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은 새 계약과 공존하지 완전히 폐기되지 않았다는 것이 세계 주류 신학계의 의견이다.

중동 평화를 깨뜨리는 가히 깡패 같은 이스라엘은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 때문에 마음이 완악해져버린 백성일 뿐이다. 교회가 새 이스라엘로서 첫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결코 완전히 대체하는 그런 경륜 교체주의적인 의미의 새 이스라엘은 아니다. 옛 이스라엘과 공존하는 새 이스라엘인 것이다(롬 9-11장을 보라. 특히 11:25-26을 보라). 따라서 현재 기독교의 정경인 성경에서 신구약이 병존하는 현상이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의 진행 경과에 대한 하나의 표지 역할을 한다. (끝)

김회권 / 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교수
* 이 글은 제1회 인문과학연구소 포럼, '회권, 도올을 깨다'(2007년 4월 24일)에서 저자가 발제한 논문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몇 차례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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