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의 쇠우리'에 갇힌 개신교 영성?
'합리성의 쇠우리'에 갇힌 개신교 영성?
  • 윤영석
  • 승인 2011.06.2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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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 조동호 교수의 '현대사회와 신학의 이해' 두번째 이야기

"오늘날 교회는 흥부를 좋아할까, 놀부를 좋아할까."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가 준비한 '현대사회와 신학의 이해' 공개 강좌 두 번째 시간에 나온 질문이다. 흥부, 놀부 형제가 '모더니티, 사회학과 신학에 나타난 성취와 극복'이라는 강의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6월 20일 뉴저지 새하늘교회(Sae Ha Neul Church, 방홍석 목사)에서 열린 공개 강좌의 두번째 시간에 조동호 교수는 "효율성, 생산성, 경쟁성의 논리로 삶을 꾸려 나가려는 현대 사회의 움직임"을 흥부와 놀부에 빗대 설명했다. 근대적 효율성의 논리로만 따지자면 의당 흥부보다 놀부가 칭찬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마저 생산과 성장의 논리에 편승하거나 이를 부추기고 있으니 오늘날 교회라면 누구의 손을 들어주겠냐는 비판적 물음이다.

"서구를 따라가는 한국 사회에서 흥부는 '나쁜 놈'으로 놀부는 '훌륭한 분'으로 되었다. 이것은 인정, 인륜, 공동체적 의무에 대한 개념을 억압, 배제하고 효율성, 생산성, 경쟁성의 순수한 시장 논리로서 삶을 꾸려 나가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오늘의 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조동호)

지난 첫 강의와 마찬가지로 저녁 8시에 시작한 강의는 두 시간이 넘게 질문과 응답으로 채워졌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에 이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와 개신교 윤리와 신학, 그리고 교회를 성찰했다. 이날 조동호 교수는 막스 베버가 논한 "자본주의 영성(Geist; Spirit)"에 초점을 맞췄다.

"자본주의 제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영도 동원한다. 영혼 자체가 이런 자본주의 제도를 운용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은, 지식의 자율성, 감정의 자율성, 의지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의 영성 운동이 그런 영혼의 능력을 고양시키는가?" (조동호 교수)

▲ 젊은 시절의 막스 베버는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 정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로, 사회학 이론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사회학과 공공정책학 분야의 근대적 연구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자본주의와 영성?

자본주의가 무슨 영성을 어떻게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조동호 교수는 베버가 서구 근대 문명에서 발생한 근대 산업 자본주의 경제 형식의 특징에 주목했다. 시장의 질서란 목표와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 소위 '인정사정 보지 않는' 독특한 태도를 요구한다. 

"자본주의 경제 형식은 시장 거래를 통해 발전되면서 목표와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도구화시킨다. 어떻게든 목표와 이익을 성취하는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람이 느끼는 감정, 애정, 인정, 변덕, 충동을 완벽하게 배제한다." (조동호 교수)

"자본주의 영성(정신)"이란, "마음(영혼)에 각인된 자본주의 질서, 자본주의적 욕망, 정서, 사고방식(habitus)"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운용을 담당한 사람(carriers, bearers)이 갖게 되는 혹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물질적 번영과 건강을 강조하는 "건강과 부의 복음(The Health and Wealth Gospel) 운동은 영혼을 자본주의의 요구에 맡기고 세상과 불화하며 세상을 바로잡는 소금과 빛의 역할은 아예 포기하고 있는 게 아닌지" 지적한다.

시골쥐 어떻게 서울쥐 됐나?

자본주의 영성(정신)은 개신교 윤리로부터 발전했다는 게 베버의 잘 알려진 주장이다. 농부의 아들딸들이 도시 공장과 사무실의 산업 노동자가 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 교수는 '시골쥐가 어떻게 서울쥐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삶과 노동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등장을 설명했다. 

"'베버는 노동을 개인의 조건에 맞추는, 즉 많이 만들면 많이 주겠다는 급여 제도(일종의 성과급)를 도입했을 때 가톨릭 노동자와 개신교 노동자의 태도를 비교한다. 경제적 전통주의(economic traditionalism)를 지향하는 가톨릭 노동자들은 일정 액수를 벌면 노동을 멈춘다. 반면,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를 지향하는 개신교 노동자는 더 열심히 일을 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번다!"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 형태인 '경제적 전통주의'와 근대 자본주의 형태인 '경제적 합리주의'의 차이다." (조동호 교수)

경제적 합리주의가 등장하기 전의 과도적 단계가 바로 개신교 윤리다. "마틴 루터의 소명 의식에 대한 가르침과 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의 영향 아래 발전한 개신교윤리는 결국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쇠우리'(iron cage)에 갇히게 되었다"고 베버의 표현을 인용해 설명했다. 된 것이다.

'쇠우리' 안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미주 한인 교회들, 특히 대형 교회는 이 쇠우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베버는 이 쇠우리 안에 갇혀 사는 이들을 니체의 말을 빌려 "말종 인간"(the last humans)", 즉 "얼이 없는, 좁아터진 전문가, 심장 없이 쾌락만 쫓는 부류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쇠우리 안에 갇혀 있는 교회들은 국 '말종 혹은 막장 교회'가 되는 것인가. 조동호 교수는 대형 교회를 예를 들며 질문들을 던졌다.

"대도시의 대형 교회에서도 우애의 공동체, 인정의 공동체가 재건될 수 있을까.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조동호 교수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며 대답했다.

"오늘날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거대화 되고 조직화된다. 그것을 과연 비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거대화 되고 조직화된 사회는 도리어 참된 성도의 공동체 건설할 틈새를 제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음은 조동호 교수의 두 번째 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오늘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1864-1920)의 모더니티에 대한 생각을 더듬어보자. 난해한 그의 글은 적지 않은 남용과 오용에 시달렸다. 두 가지 예를 들자면, 베버의 연구를 들먹이면서 "서양은 기독교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든가 "비서구 지역은 기독교를 안 믿어서 비참하다"는 말을 흔히 한다. 가치 판단을 철저히 배제하는 '가치중립적인 방법론'을 추구하는 베버가 서구 문명의 발전을 '축복'으로 봤는지도 그의 글이 주는 느낌은 오히려 우울하다. 이런 남용에는 기독교 우월주의와 서양 우월주의가 깔려있는 게 아닌가 한다.

또 베버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 해석을 뒤집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흔하다. 그래서 마치 그가 개신교 윤리(사람들의 의식과 생각)가 자본주의 발달을 가져 왔다고 주장한다. 베버는 그의 책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s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는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를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베버가 단순한 유물론을 비판한 것은 맞지만 마르크스와 정반대의 설명을 제시하려 한것은 아니다.

베버에게 평생 궁금했던 물음?

그렇다면 근대 서구 문명과 같은 희한한 문명은 어째서 오직 근대 서구(16세기 이후)에서만 발생했을까. 왜 다른 곳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을까. 서구 문명은 뭐가 얼마나 별다를까. 베버는 "별 다르다"고 본다. 

베버는 서구에서 발달한 근대 문명이 가진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현대 물리학이나 수학, 특별히 자본적 공장 경영은 불교도나 회교도,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다. 이런 서구 근대 문명은 어떤 문화, 지역, 민족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근대적 천문학, 화학, 건축술, 다성음악,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행정, 법률 체계는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가능한 형식으로 발달했다는 거다.  

특별히 베버는 어떻게 서구 자본주의 경제 형식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발전했는지에 주목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 베버가 주장하는 서구 근대 문명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은 지극히 서구 중심적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재물 욕심?

재물 욕심은 동서고금 어디서나 있었다. 이것은 서양 고유의 것이 아니다. 이런 보편적인 재물 욕심을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유치원생 수준의 자본주의 이해다.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근대 서구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아주 특이한 형태다. 근대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거래를 통한 부의 축적"이다. 고즈넉하게 들리는 이 활동이 근대 서구 문명 전체, 그리고 근대 세계 전체를 지금의 모습으로 형성한 '숙명적 힘'(fateful force)이었다 베버는 본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서구사회와 근대사회 전체를 오늘의 모습으로 형성하게 되었을까. 베버는 시장에서 맺어지는 거래 관계의 특성에 주시한다. 이 시장 거래 관계에서는 오직 상품만이 문제가 된다. 시장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특징은 'Matter-of-factness'다. 사무적, 실무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인정사정을 안 본다.  그게 순전한 거래 관계와 시장 경쟁이 요구하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 사회, 삶과 인간에 대한 태도는 '도구적 합리성'이다. 모든 게 목표성취를 위해 예측가능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도구적 합리성은, 사람다운 감정, 애정, 인정, 변덕, 충동을 완벽하게 억압, 배제, 관리하고자 한다. 

시장사회는 계약을 준수를 요구한다. 고용주와 노동자, 업자와 업자 간의 계약, 도매업자와 소매업자 간의 계약이 철저히 지켜져야 돌아간다. 사유재산권과 함께 계약준수를 강제하는 기구가 국가이고 법률제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와 법률은 어느 개인의 의사와 변덕에 따라 좌우될 수 없도록 형식적 합리성을 띠게 된다. 계약 당사자들은 누구나 법률 앞에 평등하다. "법은 법"이라는 태도가 등장한다.

국가기구의 운용도 개인의 자의에 따라 이뤄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누구나 따라야 하는 규칙과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 행정기구만이 아니라 교회 같은 현대사회의 다른 조직도 이렇게 관료제의 형식을 갖게 된다.  

베버가 본 '자유' 시장

베버는 '자유' 시장(free market)을 어떻게 보았을까? 이 자유 시장은 이익 추구, 독점적 지위 유지, 거래(흥정, 협상)에서 어떤 윤리와 규범에도 구속받지 않는 시장이다. 개개인들이 시장에서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자유 시장이다. 하여 온갖 형태의 형제애, 인정, 박애의 윤리(fraternity ethics)는 자유 시장에게 가증스러운 것이다. 시장 집단은 모든 형태의 인간적 유대, 심지어 혈연관계를 전제하는 여타 집단과는 달리 우애, 박애, 형제애의 존재에 대해 낯설다.

이런 시장은 낯선 사람들,(잠재적인) 경쟁자, 적이 만나는 장소이다. 그래서 지속적이고 평화로운 거래(교환)의 조건, 즉 규칙, 평화, 안보가 중요하게 된다. 과거에는 신전이 평화로운 거래를 보장하는 역할을 했고, 지금은 국가와 법률 체계가 이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경찰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는 합법화된 폭력 집단이다.

예를 들어, 대규모의 노동자들이 노동계약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해 대규모 파업을 시행하면 국가는 전면적으로 그 파업을 진압하게 된다. 사람들이 국가에 의지하고 필요로 하는 이유는 국가가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사회 전체가 거래 관계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려면 국가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적과 적이 만나는 시장에서 평화적 거래의 전제 조건은 '힘의 균형'과 '미래의 사업 기회에 대한 타산'이다. 베버는 이런 교환 관계가 확장되면 상대적 평화를 창출하는 경향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시장 질서는 '주인 마님 없는 노예 제도(masterless slavery)'를 만들어 낸다. 누가 내 주인인지 알 수 없고, 법률 제도가 내 주인이 된다. 이 주인 마님 없는 노예 제도에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 객관적 사정이 주요 결정을 내린다. 즉, "따르던지 떠나던지"의 선택만이 주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인간의 행동은 비인간적(impersonal)으로 되고 사람이 하는 행동은 바로 이윤 추구의 목적으로 정해진다.

그리하여 전 방위적 규제, 훈련, 버릇 들이기(discipline; habitus; habituation) 식의 군사훈련이 근대 자본주의 공장의 훈련 모델이 된다. 또한 개별 노동자의 생산성을 정밀 측정하고 비교한다. 이런 발전의 정점에서 나온 게 '과학 경영 운동'(scientific management movement)다. 사람의 몸(신체)과 마음(심리)을 미세관리하여 가장 효율적인, 가장 생산 높은 생산수단으로 만든다. 기계에 완벽하게 맞추고, 기계의 규칙을 생명체에 강제한다.

예를 들어, 공장은 작업 중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신체를 움직일 수 있고 작업의 흐름(work flow)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연구한다. 또 직장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과 존칭을 하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일의 능률과 생산성을 높이는지 연구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베버는 '생산 활동 전 과정의 합리적 조직화(특히 명목상 자유로운 노동력의 합리적 조직화), 기업과 가계의 분리, 회계 기법의 합리화, 사유재산권과 계약 효력의 법률적 보장과 보호, 과학과 기술의 육성, 새로운 산업을 담당할 노동자와 경영자 교육, 그에 걸맞은 스포츠, 레크리에이션, 문화, 예술 개발'을 동반하는 '일터, 정치, 여가 생활의 합리화'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화는 앞서 논했던 '도구적 합리화'를 뜻한다. 결국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가 생활 또한 과학적 경영 운동에 지배를 받고 도구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개인의 카리스마와 개별성이 사라진다.

자본주의 정신 혹은 영성(Geist; Spirit)?

이러한 경제체제를 굴려나가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담당자들에게 요구되는 마음의 자세, 태도, 영성이 '자본주의적 영성,' '자본주의의 에토스'(ethos)이다. 마음(영혼)에 자본주의의 요구가 각인되어야만 체제가 제대로 작동한다. 

대부분 농부의 아들딸들이 도시의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자가 된다는 게 자본주의 초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골쥐는 어떻게 서울쥐가 되었을까를 추적한 게 베버의 연구다.  베버는 도급제 (완성한 제품의 양에 따라 임금을 주는 제조)에 대해 가톨릭 노동자와 개신교 노동자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경제적 전통주의(economic traditionalism)를 지향하는 가톨릭 노동자들은 일정 액수를 벌면 노동을 멈춘다. 반면,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를 지향하는 개신교 노동자는 더 열심히 일을 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번다!"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 형태인 '경제적 전통주의'와 근대 자본주의 형태인 '경제적 합리주의'의 차이다.

경제적 합리주의의 모태가 개신교 윤리이다. 개신교 윤리의 핵심은 인간적인 욕망들을 끊어 내며 사는 수도원에서 실천한 금욕주의(타계적 금욕생활 other-worldly asceticism)를 세상과 일터 그리고 가정에서 실천하는 성자의 삶(현세적 금욕생활 this-worldly asceticism)을 지향하는 데 있다. 즉, 수도원에서 실천한 방법적이고 체계적이며 엄격한 생활을 일터와 가정에서 실천한다.

베버는 현세적 금욕 생활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청년이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어느 침례 교회에 등록하려 했다. 그는 은행을 개점할 계획이었다. 그 침례교회 제직은 그의 자격을 심의했다. 뭘 물어봤을까? 침례교 교리에 대한 질문보다는 이런 질문이 주종이었다 "과거에 살던 곳 주소를 다 말하세요. 빈민 구제소에 간 적이 있습니까? 술을 마신 적이 있나요? 놀음한 적은?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적은? 각종 요금을 제 때에 냈습니까? 다른 빚은 없습니까?"

이 질문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성자의 삶을 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해 교회의 교인이 되고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보증수표로 인정되었다. 이런 현세적 금욕 생활은 퀘이커 교도들의 사업 성공 비결이 되기도 했다. 퀘이커들의 정직한 사업 방식은 "불신자들이 우리한테 돈을 갖다바치네!"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비퀘이커교도들이나 비그리스도인조차도 또한 이들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결과를 낳았다. 처음으로 정찰제를 도입한 것도 퀘이커 교도들이었다.

그렇다면 제도 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r simply the Church)와 갈라선 소종파 운동(sects)은 왜 기업 운영에 성공적이었을까? 제도 교회의 신도는 태어나자마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신도가 되었다(모태신앙). 소종파 운동은 신앙에 대한 주체적 결단 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제도 교회는 가짜라고 비판한다. 주어진 신앙에 만족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진지했다. 성자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친 사람들이었다.

신학적으로는 직업 역시 하나님이 주셨다고 주장한 마틴 루터의 소명(calling; beruf) 의식과 양이나 염소냐의 구원 문제를 다룬 존 칼뱅의 이중 예정론이 현세적 금욕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 윤리에서 나온 생활 전체의 방법적, 체계적 관리, 규제는 '몸과 영혼(중심을 보시는 신), 시간표, 규칙성, 육신, 안목, 귀의  정욕에 대한 싸움, 일기 쓰기(영혼의 회개), 감정의 규제, 성의  목적, 쓸모 있는 글(사업을 도움이 되는 것, 법률, 공학, 교육)과 쓸모없는 글(인문학: 가톨릭은 인문학을 강조, 소설), 죽을 죄(시간을 낭비하는 것)'등에서 나타난다.

어떻게 흥부는 '나쁜 놈'으로 놀부는 '훌륭한 분'으로 되었을까?

재물의 유혹을 누가 당하랴. 돈이 많아졌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인가. 혹은 유혹인가. 재물이 생기면 유혹이 생기고 곧 그것에 빠진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다는 신앙은 재물의 유혹에 무릎을 꿇는다. 개신교윤리로부터 신앙과는 무관한, 세속화된 도구적 합리성, 즉 자본주의 정신이 등장한다. 개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공유한 핵심은 삶의 방법적, 체계적, 합리적 조직이다. 개신교윤리에서 삶, 행동과 욕망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철저히 조직되고 관리되었다. 자본주의 정신에서는 적나라한 이윤 추구를 위해 그리된다. 이런 발전의 결과물이 도구적 합리성의 '쇠우리(iron cage)'이다. 아무도 이 체제의 요구로부터 피할 수 없다. 따르던지 싫으면 떠나야 한다. 

새로운 카리스마의 도래? 고대 이상의 르네상스?

베버 저작의 결론 부분을 함께 읽어보자:

"청교도들은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을 뛰쳐나와 소명감에 찬 노동의 삶으로 흘러들었고, 마침내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근대 경제제도 – 기계화된, 기계에 기초한 생산의 기술적 경제적 조건에 구속된 경제체제 -라는 막강한 우주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 이 우주는 경제적 생산 활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끝없이 돌아가는 이 기계 속에 태어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결정한다. 압도적인 힘으로. 아마도 화석연료의 마지막 한 방울이 타 재로 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다. 설교자 백스터에 의하면, 재물에 대한 관심은 성자의 어깨에 걸친, '아무 때고 벗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망토'같은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망토는 쇠우리(an iron cage, or a steel-hard casing)가 되었다. 금욕주의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을 끼치려 한 만큼 세상의 재화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은 증가했고 결국 역사상 유례없이 피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쇠우리를 탈출했다. 그러나 그게 이야기의 끝일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승리에 찬 자본주의는, 기계 생산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금욕주의라는 받침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금욕주의의 즐거운 상속자인 계몽운동의 낙관성마저도 결국 희미해지고 있다. '소명을 찾고 그런 다음 소명을 받아들일 의무'라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실다운 신앙에 뿌리내리지 못한 유령 같은 신조로 우리의 삶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소명의 완수"라는 개념이 최고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어울리지 않거나, 반대로 경제적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경우가 아니면, 가차 없이 버린다. 미국처럼 이익 추구가 어떤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되고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벗어버린 곳에서, 이익 추구는 순수한 경쟁열 그 자체로 된다. 흔히 이런 경쟁열은 운동 시합의 승부 같은 성격을 띤다.

이 쇠우리 속에서 누가 살게 될지, 아니면 이런 희한한 역사 전개 과정의 끄트머리에 아주 참신한 예언자들이 등장할지, 고대의 이념과 이상이 새롭게 만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로 아니라면, 기계화의 진행으로 마른 뼈처럼 되었으면서 언제나 강박적으로 '내가 최고'라는 착각하는 인간들이 등장할까. 이런 식의 형해화가 진행되면 이 긴 문명사의 끝에 '말종 인간'(the last humans)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실현될 터이다. 얼이 없는, 좁아터진 전문가, 심장 없이 쾌락만 쫓는 부류들, 그러나 이 문명은 자만심에 부풀어 인류 발전의 정상에 올랐다고 상상할 것이다." (막스 베버)

결국 베버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합리성의 쇠우리에서 길들여져 니체가 묘사한 '말종 인간', 좀비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쇠우리를 벗어난 '예언자'가 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선 자리는 어디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뉴욕·뉴저지] 미주뉴스앤조이아카데미 공개강좌

- 장소 : 뉴저지 새하늘교회(방홍석 목사) Sae Ha Neul Church, 440 Bergen blvd Palisade Park NJ 07650
- 일정 : 매주 월요일(6주간)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6월 13일 - 에밀 뒤르켐 : 옛 신들은 늙었고 새 신은 아직 오지 않았다
6월 20일 - 막스 베버 : 합리성의 쇠우리에 갇힌 “막장 인류,” 카리스마를 기다리다
6월 27일 - 카를 마르크스: 허무에 종살이하는 만물이 자유를 대망하다
7월 4일 - (독립기념일) 휴강
7월 11일 - 테오도르 아도루노: 우상 금지 계명의 철저한 수행으로서의 비판이론
7월 18일 - 신학과 교회의 대응 (1)
7월 25일 - 신학과 교회의 대응 (2)

- 문의 및 참가 신청 : <미주뉴스앤조이> newsnjoy@n314.ndsoftnews.com 201-665-9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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