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종교, 삶에 던지는 '질문'
문학과 종교, 삶에 던지는 '질문'
  • 윤영석
  • 승인 2011.07.06 08:5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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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문학과 신앙의 만남: 신경숙 작가와 김영봉 목사의 대화

▲ 지난 4월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판 을 출간한 신경숙 작가 ⓒ미주뉴스앤조이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판 <Please Look After Mom>을 출간해 미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신경숙 작가와 김영봉 목사(와싱톤한인교회)가 대담을 가졌다. 지난 7월 2일 와싱톤한인교회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신경숙 작가와 김영봉 목사의 대화로 시작해, 참가자들의 질의응답으로 이어졌다. 김 목사는 신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소재로 2009년 5월부터 5주에 걸쳐 연속 설교를 했고, 이를 <엄마가 희망입니다>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대담에서 신 작가는 소설을 쓰게 된 동기, 소설에 대한 평들, 문학과 종교의 차이 등을 이야기했다. 특히 신 작가는 문학과 종교의 차이점에 대해 "문학은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제 생각에 종교는 진실이라는 해답 같은 게 있다. 문학 텍스트는 읽으면서 혼란스러워지는데 비해 성경은 읽으면서 더 맑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설교 또한 "답하는 게 아니라 바른 질문은 던지는 것"이라고 하며 "문학과 종교, 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통하는 것이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 김영봉 목사와 신경숙 작가 ⓒ미주뉴스앤조이
다음은 신경숙 작가와 김영봉 목사의 대담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김영봉 / 원하든 원치 않든 <엄마를 부탁해>가 본인의 대표작이 되었다. 어떤 계기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

신경숙 /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가지고 2007년과 2008년 일 년 동안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에 네 번 게재했다. 쓴 기간은 일년이라고 생각이 되겠지만 내 마음 속에는 오랫동안 쓰여져있던 작품이었다. 16살에 정읍에서 서울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 시절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6월 11일 11시 57분 기차를 탔던 걸 기억한다. 하나의 사진처럼 그날 밤의 풍경이 머리 속에 찍혀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엄마와 제가 밤 기차를 탔다. 마주 앉아 있는 엄마를 기차 유리창으로 봤는데 졸고 계셨다. 그걸 바라보는데 헤어지는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엄마가 너무 힘들고 고단해 보였다. 마음 속으로 '저 도시로 가서 작가가 된다면 고단해 보이는 우리 엄마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 같은 책을 써보겠다'라고 다짐했는데2007년과 2008년 사이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

▲ 김영봉 목사와 신경숙 작가의 좌담회가 7월 2일 와싱턴한인교회에서 열렸다.
김영봉 / 설교를 준비면서 이 소설을 교인들에게 읽도록 권장했는데 반응들이 다양했다.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무서워서 못 읽었다' 혹은 '엄마와의 특별한 스토리가 없어서 공감이 안된다'는 등 엄마의 경험이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독자들에게 해줄 말은?

신경숙 / 그런 반응들이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얼마전 낭독회 때 제 엄마 나이 또래의 미국 독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 독자는 엄마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설을 읽었더라면 화해하려고 노력을 했을 거라는 소감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박소녀(주인공 엄마)는 독자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입구 같은 역할을 한다. 전체적인 소설의 에피소드가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가 같은 공감을 유도하지 않는다. 자전적인 요소가 얼마나 들어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소설에서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엄마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안에 세대 간의 차이와 전통과 현대와의 단절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있다. 그래서 열 사람에게 똑같이 느껴질 수 없다. 각자에게 다른 것을 파문을 남기는 것이 당연하다. 연못에 돌을 던질 때 여러 가지 파문이 일어난다. 어떤 파문이 일어날지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좋은 파문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영봉 /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설교를 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발견했다. 엄마는 늘 부탁을 받아주던 분인데 그런 엄마를 부탁한다는 것, 엄마가 부탁의 목적이 되었다. 이 책을 탈고하고 출판사에 넘겨줄 때 큰 반향을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가?

신경숙 /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품을 쓸 당시 (특히 장편소설일 경우) '어떻게 끝까지 완성시키는가'라는 생각만으로 벅차다. 소설의 주인공이나 화자들이 처음에는 작가 자신이 얼굴과 배경을 만든다. 그런데 소설의 3분의1이 지나면 이 소설 속에 있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말을 한다. 장편소설의 경우에는 이렇게 저절로 생기는 것들을 다 따라가기도 벅차다. 또 이게 내가 정말 말하려 했던 것인가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어 버려서 결국 '이건 내가 만든 일도 아니고 내 일도 아니다'란 생각을 한다. 바람이 불면 회오리가 치고 독일에서 날아온 씨앗이 한국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피기도 하듯 지금 일어난 큰 반향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김영봉 / 소설과 설교가 비교는 안되지만, 설교도 굉장히 창조적인 작업이다. 그래서 저도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신 작가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 저는 신앙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믿는다. 작가들도 어느 정도의 틀과 방향을 만들고 인물 설정을 하지 않겠나. 등장인물 제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 간다는 말을 하면서, 내가 쓰는 것이지만 나 이외의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처음 시작했을 때 목적과 구도, 방향 그리고 실제로 완성됐을때 어떤 관계를 갖는가?

신경숙 / 어떤 형식이나 그런 것은 분명히 생각을 해놓는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 가족들이 한사람씩 무대에 올라서 나와 엄마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말해야 겠다'는 것과 '인칭을 정할 때 엄마한테만 일인칭인 '나'라고 말하게 하겠다'는 것을 정했다.

첫 문장이 저에겐 굉장히 중요하다.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라는 첫문장이 이 소설을 완성시킨다. 첫문장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이 첫문장이 "지현"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너는"이라고 하는 말이 "그는"이라고 하는 아들의 입장을 만들어 내고 "그는"이라는 말이 "당신은"이라는 아버지의 입장을 만들어 내어 스스로 찾아간다. 이야기를 쓸 때 제가 실제로 경험한 것은 다섯 손가락 중 하나다. 가지가 뻗어나가듯 이 하나에서 출발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지나간 역사적인 일들, 혼자 예측해보는 미래의 상상적인 것들에 의해 이끌려 쓰게 된다. 처음 소설을 구성할 때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 생생한 현실이 끼어 들게 되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 질문에 답하고 있는 신경숙 작가 ⓒ미주뉴스앤조이

16살 때 생각했던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 제가 16살 때 생각했던 엄마는 어떤 일에서도 내 편이 돼주고 흔들리지 않는 강한 존재로서의 엄마였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강해지고 사회에서 내 역할을 하면서 튼튼해지는 사이 나를 있게 한 16살때의 강한 엄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병약해진다. 이것이 단순한 깨달음이지만 현실로 느낄 때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언젠가 이 (16살 때 강한 존재로서의) 엄마의 역할을 바꿔야 할 때가 온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내게 있던 가장 큰 갈등이었다. 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온 7년후 작가가 되고 27년이 지난 후에 이 소설을 쓰게 되는 동안 엄마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는 갈등 속에 부딪쳤다.  <리진>을 쓰고난 후 예상치않게 갑자기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이 찾아왔다. '왜 그동안에 이 작품이 안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만큼 폭풍처럼 이야기가 나왔다. 직접 쓰기 시작할 때는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점점 더 번져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김영봉 / 제가 개인적으로 받은 메시지는 엄마가 일방적으로 희생해 이렇게 됐는데 이제는 엄마의 역할을 나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가부장적 제도에서 엄마의 희생을 정당화시켰다는 비평이 있다. 작가 본인의 마음을 알아줬다는 평과 의도와 다른 평이 있는가?

신경숙 / 대답하기가 힘들다. 그저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가 알고 있던 엄마의 모습만이 아니고 엄마를 다시 한 번 보는 소통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엄마를 엄마로만 보면 나의 엄마로만 태어난 사람이라고 본다. 이 소설이 엄마의 어린 시절이라던지, 혹은 '내가 처음 배운 말이 엄마였다면 엄마가 배운 말도 그 말이었을텐데'라는 등 엄마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통로가 되는 것에 작가로서의 보람을 느낀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엄마가 환상 속에서 자신의 엄마의 무릎에 누우면서 하는 마지막 말이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 일생동안 엄마가 필요했었다는 것을"이다. 이 말을 내가 아닌 바로 엄마가 한다는 것, 엄마도 엄마가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길 바란다. 질문과 다른 대답이다.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어떤 평들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던져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연하다.

김영봉 / 문학과 신학이라는 주제로 넘어가자.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비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 종교를 갖는 이유와 갖지 않는 이유 모두 한사람의 삶과 사회를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피에타상의 장면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그리고 종교와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또 문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경숙 / 소설의 4장을 마친 뒤 에필로그를 써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차에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다. 이 여행을 작품 때문에 간 것은 아니었고, 예전부터 계획하던 것이었다. 로마에 가서 처음 들린 곳이 바티칸이었고 거기서 방탄유리 속의 피에타상을 처음 보았다. 좋다 나쁘다의 판단 없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보게 했다. 마치 피에타상이 성큼성큼 걸어서 내 작품 속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가고 나서도 오랫동안 피에타상을 바라봤다.

여행 후 에필로그를 쓸 때 그 경험과 느낌이 들어왔고 그것이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라는 첫 문장이 에필로그에서 "엄마를 잃어버린지 구 개월째다"로 시작되게 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역동적으로 발전하면서 엄마라고 상징되는 것들, 즉 인간성, 따뜻함, 엄마의 손을 잡을 때 그 접촉, 체온이 섞이는 인간적 교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 마지막 문장 "엄마를 잃어버린지 구개월째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상실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물음이 이 문장에 들어있다고 봤다.

문학과 종교의 관계는 예민한 주제다. 문학이 종교와 다른 한가지를 말한다면 문학은 질문이다. 문학은 해답이 없다.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대답이 없고 각자 찾아야 되는 것이다. 이 소설 안에서 '왜 엄마가 안 찾아지고 이렇게 끝나는가?'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엄마와 나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게 바로 엄마를 찾아내는 것이다. 문학은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제 생각에 종교는 진실이라는 해답 같은게 있다. 문학 텍스트는 읽으면서 혼란스러워지는데 비해 성경은 읽으면서 더 맑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기본은 같은 곳에서 출발하지만 끝에 가서 문학은 질문이고 종교는 답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 김영봉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박지호
김영봉 / 설교가 뭐냐는 것에 대해 배울 때 답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설교를 직접하다 보니 답하는 게 아니라 바른 질문은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답은 누가 주는가? 답은 스스로 찾고 또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많은 강단에서 외침이 있지만 그것이 너무 도식적인 정답을 주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문학과 종교, 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통하는 것이 있다고 본다. 제가 작가의 허락없이 이 작품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토의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설교 씨디를 찾는다. 그때를 통해서 치유를 경험한 분들도 있다. 문학이라고 하는 성경 밖의 스토리를 가지고 종교적인 바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가지고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이 영향력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경숙 / 열사람 모두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교회에서 사용될 지 상상도 못했다. 김영봉 목사에 의해 작품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긴장됐다. 제 작품에서 미쳐 숨겨놨던 많은 이야기들이 <엄마가 희망입니다> 안에 있었다. 문학에선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단 숨겨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엄마가 희망입니다> 안에는 숨겨놓은 것보다 곱하기 열은 더 있었다. 어머니가 서울에 오시면 읽어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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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 2011-07-12 12:28:48
신학이나 철학 역사학 문학 등에서 '창조성'이라거나 '상상력'이란 뜻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나 공연한 '상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질적 사유 과정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들이지요... 여기에는 많은 유.무형의 과정과 수단들이 동원되기도 하는데요... 이게 신앙의 세계인 경우 하나님이 이끄시는 계시의 역사 앞에 성실한 사람들에게 이같은 창조상과 상상력이 주어진다는 말이지요... 문학이나 단절된 역사를 잇는 작업도 이와 비슷한 질적 사유과정을 거치지요...그리고 하나님의 은폐된 세계는 우리이게 은폐되어 있을 따름이지 성서 안에서 이미 계시된 것입니다. 이 은폐된 계시를 캐내는 작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설교가 아닌가 합니다. 이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굳어진 '정보' 수준의 성경이해에 머물게 되겠지요...

bella lee 2011-07-12 12:04:47
글쎄요, 성경이 창작물이라고들 우겨대는 무신자론들에게 맞서서 창세기 1장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모두 진리인것을 주장하는 기독교 신자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창조성' 과 '상상력' 이 들어간다면 참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인터넷 세대들은 더 멋지고 세련된 설교를 찾고 바라고 목사님들도 그에 많은 부담을 느끼겠지만, 사도바울과 제자들은 성경 말씀과 기도로 진리 하나만 가지고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님들이 헬라어와 히브루어를 배우고 신학을 공부하시는 이유는 물론 성경을 사람들에게 더 정확하게 가르치기 위해서이지 진리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서는 아닐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폐'된 세계는 우리가 예수님이 오시면 알게될것들이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것을 억지로 상상하는것처럼 위험한게 없다고 봅니다.

atom 2011-07-12 04:44:55
성경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계가 은폐된 채로 계시되어 있고... 은폐된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성서 해석자들 설교가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 아니던가요? 은폐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창조성'과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이같은 창조성과 상상력은 아무래도 위로 부터 충성스러운 분들에게, 그리고 열심이 있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언어도 배우고 성서고고학도 연구하고 철학도 사회학 등등도 이같은 창조적인 작업을 위해 필요한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선 이런 창조적인 작업을 위한 도구들을 믿는자들에게 주신 거 같습니다. 은폐된 성서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게 창조적인 일 아닌가요?

bella lee 2011-07-09 00:19:06
신앙을 지적으로 표현하고픈 김목사님의 의도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분이 '설교는 창조적' 이라는 말을 들으니 당황스럽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는것이라고 생각안합니다.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신경숙 작가님의 말처럼 소설은 사람들이 다르게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각자 다르게 받아드릴때 이단이 생기고 지금처럼 병든 한국의 기독교문화가 퍼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