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투표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구현할 수 있는가
총선 투표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구현할 수 있는가
  • 차정식
  • 승인 2012.03.23 0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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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4.11 총선, 연고주의적 인간관계를 비신앙 규범으로 간주하고 극복해야"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거리마다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대문짝만 한 후보들의 사진이 면상을 들이대며 행인들에게 눈도장 받기에 분요한 풍경이다. 모바일 선거의 시대를 맞이하여 핸드폰으로 전송되는 자기 홍보의 문자 메시지도 심심찮게 받게 된다. 정당마다 후보자를 뽑아 세우기 위한 시끌벅적한 공천 작업의 후일담이 시중에 떠돌고 그 예비 과정에서 낙마한 자들의 볼멘소리와 함께 '살생부'니 '공천학살극'이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퍼져 나온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확성기를 입에 들이댄 선거운동원들의 나팔소리가 이 땅을 또 한 차례 뜨겁게 달굴 것이다. 숨어 있던 애국지사들이 갑작스레 포효하며 자신이 국회의원으로 뽑히기만 하면 이 땅의 정치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서민들의 삶이 전폭적으로 갱신되리라는 선거 구호가 곳곳에 삐라처럼 뿌려질 것이다.

거기에 헛된 에너지의 낭비가 왜 없겠는가. 선거판에 왜 헛된 공약과 선전선동이 빠지겠는가. 그로 인한 부조리의 반복이 어찌 아주 사라지겠는가. 평상시 제 잇속을 주로 챙기고 제 파당의 배타적 관심사로 골몰하던 무리들이 선거철이 되면 다시 또 국민의 충복인 양 그토록 몸을 낮추며 겸손해지는 이 기이한 현상에 이 땅의 백성들이 몹시 식상해하고 지쳐 있음을 나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상투적 냉소가 선거철마다 우리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그만큼 선거의 계절은 또 다른 배신의 계기로 억장 무너지는 백성들 가슴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불만스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시민으로서 정치를 수수방관할 수 없다. 다행히 점점 더 정치의식이 깨어나는 젊은 세대들 가운데 '닥치고 정치!'를 외치며 전혀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갈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그들이 혐오했던 그 정치판의 진로가 자신의 일상적 행복과 무관치 않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대학 학비가 과다한 것도, 힘들게 졸업한 뒤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취업해 봐야 비정규직의 쥐꼬리만 한 월급을 강요받는 것도,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결혼하기가 쉽지 않고 결혼해도 거주할 방 한 칸 구해서 자식 낳아 키우기가 그토록 어려운 사연도 모두가 결국 정치판의 인물들이 어떤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어떤 정책을 만들어 법제화하며 어떤 방향으로 재정 집행의 우선권을 설정하는가 하는 점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정치라는 세계가 교회에서 강조해 온 초월적 신앙의 저편이 아니라 그 신앙의 한복판에서 매우 구체적인 결단과 참여를 요구하는 제자 됨의 중요한 증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점도 가볍게 넘길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그동안 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이 땅의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정치적 우민화를 조장해 온 혐의가 없지 않다. 고작 한다는 게 규모가 큰 교회의 목사들을 중심으로 자신과 통하는 몇몇 정치인들과의 사사로운 인사 치레를 통해 교인 대중의 표를 몰아 주는 데 일조하거나 권력의 암묵적 카르텔 체계 내에서 서로 간의 이권을 주고받으면서 음흉한 상부상조의 관행을 고착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정치적 담합의 체계 내에 순치된 상태로 그처럼 구태스런 표몰이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평신도들이 점점 더 늘어가는 추세이다. 특히 올해에는 이번 4.11총선이 대통령 선거와 같은 해에 치러지는 터라 지난 4년간 MB정권이 자행한 온갖 실정으로 인한 항간의 분노와 배신감이 표심에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을 끌고 있다. 처음에 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좋아하고 성공한 CEO출신이 백성들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다가 거의 파탄 지경으로 퇴락한 현 정권을 향해 이제는 오만과 무능의 극치로 규정하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날카로운 심판의 목소리를 높여 <굿바이 MB>라는 책이 기독교방송국의 한 기자에 의해 출간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총선과 대선의 해에 목회자와 교회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정기 포럼이 열리고 있다. 이러한 열띤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도 선거철에 임하여 이 땅의 정치 개혁을 향한 기독교계의 열망을 담아 내고 있다.

현실 정치의 최고 목표가 권력의 획득에 있음을 대체로 사람들은 공감하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속 정치의 본질이 파당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백성들의 삶을 소외시키는 꼴을 이 땅의 절대 다수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그것이 심판의 형식이든, 개혁의 명분이든, 어떤 종류의 참여를 통해서라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2012년이라는 역사의 대전환점에서 제 몫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 정치의 권력 체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의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구현해 나가기를 기원하는 공통의 관심사로 표출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선거를 통한 정치의 변화가 복음과 유관한 선교 사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정치와 만나는 일이 절실하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께 고함

생산적 의미의 정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전통에 절묘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정치이자 하나님의 샬롬을 구현하는 실천적 공정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1세기 갈릴리를 필두로 이 땅의 왜곡된 삶의 질서와 모순된 체계를 전복하며 갱신하는 급진적인 도전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와 정치의 최상부 권력층이 서로 담합하여 그 땅의 절대 다수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며 소외시킨 당시의 체계에 맞서 예수는 그 변두리로 탈주하면서 병들고 가난한 생명의 어둔 골짜기를 북돋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제 권력과 권위의 콧대를 세워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산을 깎아내려 평탄케 하는 메시아의 사역에 주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헤롯을 '여우'라 칭하고, 빌라도 총독과 대제사장 가야바의 위세 어린 재판정에서 침묵으로 항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시에 그가 갈릴리를 중심으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병든 자들을 고치며,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떼와 같은 유랑민을 하나님나라의 교훈으로 위로하고 희망을 주었던 것도 필연이었다. 게다가 지역 토호 수준의 종교적 권위와 율법 지식으로 백성을 억압하거나 등쳐 먹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예수가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운운하며 독설을 퍼부은 것도 하나님나라스런 정치적 레토릭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개념의 속살부터 철저하게 정치적인 구호였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의로운 뜻이 이 땅의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 그 어떤 생명도 서럽고 한스럽지 않도록 두루 일용할 양식의 풍요와 일상적 삶의 평화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가는 보편적 공의의 체계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게 하나님이 유일한 제왕으로 이 땅에 임하여 직할 통치하는 식민지 백성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선포하고 구현하고자 애쓴 예수의 동선과 행태가 응당 그러한 공생애 사역의 균형 감각 가운데 무르익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라면 이번 4.11총선에서 어떤 입장을 표하시고 어떤 정당의 어떤 정책에 비교적 공감을 표하실까. 예수의 메시아 정치가 올해 한국 사회의 총선에서 발현된다면 어떤 후보의 어떤 계획과 비전에 동의하시고 어떤 의욕과 도전을 격려하시며 한 표의 힘을 보태 주실까. 이러한 질문은 만유의 구원 사역에 걸맞은 예수의 위상과 관심 폭을 신학적으로 축소시키는 문제가 없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의 갈릴리 사역을 숙고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 정치가 이 땅의 정치판에서 구현되길 기대하면서 대강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은 식민지 분봉왕 체제의 팔레스타인에 비해 하나님나라의 모델에 터하여 평화와 공의의 정치, 사랑과 은혜의 정치, 소통과 화해의 정치를 실현할 만한 여건이 상당히 무르익은 상태이다.

막상 총선 당일에 가면 이 모든 기대와 염원은 유권자의 투표지 한 장으로 판명날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정치를 기준으로 정당과 후보를 선별하는 현실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 안목이 '현실적'이라 함은 까마득한 이상적 목표를 앞세워 쉽게 좌절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최선의 경우가 못 되면 차선의 선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실 정치판에서 드러나는 최선은 모두가 차선의 경우로 낙착되는 이치에 크리스천 유권자들은 눈떠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명백한 선택의 기준을 설정한다면 이 땅의 정치를 후진적으로 퇴락시킨 온갖 연고주의를 혁파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연고주의는 혈통 가족주의를 근본 토대로 지역주의와 학연주의의 형태로 번식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진영을 구축하면서 할거하고 있다. 예수는 일찍이 '누가 내 형제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혈통 가족주의의 족쇄를 깨버렸다. 예수에게 혈통 가족을 넘어 새로이 재구성된 '하나님의 가족'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준에 따라 규정되었다. 예수가 유다 지파의 출신 배경을 표나게 내세우면서 가족이나 지파의 정체성에 안달하거나 함몰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삶은 외려 히브리서 기자가 잘 묘사한 대로 어미도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바람 같은 멜기세덱의 스타일에 가깝지 않은가.

이러한 예수의 경우에 비추어 4.11총선에 임하는 그리스도인 투표자들은 무엇보다 지극히 연고주의적인 인간관계의 장벽을 비신앙적인 규범으로 간주하여 이를 극복해야 한다.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기준을 살릴 때 우리는 이 땅의 정치적 권력 분배의 지형을 면밀히 준별하여 왜곡된 사회경제구조를 쇄신하고 올곧게 공평과 정의의 체계를 수립할 만한 후보와 정당과 정책을 투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 만연한 탐욕의 경제와 이로 인한 자본 지향적 무한 경쟁의 아귀다툼을 제어하면서 인격의 얼굴을 한 생명의 향유가 일상의 자리에서 구현되는 생활 정치의 꿈을 후보자에게 투사해 보아야 한다. 해마다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청년 실업자와 850만 비정규직의 서러운 삶을 구제할 만한 신실한 의욕으로 초지일관 실천할 수 있는 견고한 자세와 명랑한 기상을 후보자의 평상심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이 우리에게 긴요한 것이다. FTA 체제의 불안한 미래와 4대강 사업의 성급한 성과주의를 냉철하게 반성하고 꽉 막힌 불통의 남북 관계에 활로를 열어 감으로써 민족 공동체 차원의 공감대를 일구는 것도 그 통찰의 절박한 대상이다. 이로써 그 어긋난 질서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회복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잘 분별하여 한 표의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아무리 후보자의 비전과 정당의 정책을 꼼꼼하게 살펴도 선거가 끝나면 그것이 속임수나 헛공약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처럼 미래의 청사진으로 불충분할 경우 우리는 마땅히 그 정당과 후보자의 과거 행적을 살펴야 한다. 이때의 성서적 기준은 '열매로써 그 나무를 안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우리는 여러 신문기사들을 잘 검색·비교하고 그 정보를 다양하게 섭렵만 해도 한 정당의 역사와 내력, 한 후보자의 살아온 족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해당 정당이 아무리 이름을 고치고 특정 인물이 아무리 거창한 경력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할지라도 그 과거의 열매만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다. 전력이 국회의원이라면 그가 그 본분에 맞게 얼마나 성실하게 의정 활동을 했는지, 얼마나 다수 서민의 편에서 균형 있게 정책을 개발하고 그것을 법제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는지, 또 그 정당이 이런 방면에서 얼마나 튼실한 성과를 내왔는지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따져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정한 기준이 판단의 객관적 준거로 작용할 때 우리는 어설픈 딱지로 달라붙은 아무개 교회의 세례 교인인가, 집사인가, 장로인가 등의 외형적 타이틀에 연연해하며 군중심리 가운데 범하는 실책을 최대한 예방할 수 있다.

때마다 정치의 파산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정치인을 손가락질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 정치인의 정치 행위에 드러난 질적 수준이 곧 우리 국민의 평균치 정치의식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열악한 형편이 이 땅의 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결과와도 무관치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내놓은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공과와 그 수준이 역사의 너른 시야에서 현실 정치를 투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안목과 비례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예수가 견지한 하나님나라 정치의 비전이 얼마나 작동해 왔는지 자문해 본다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오 각성해야 마땅하다. 아무리 교회 안팎에서의 활약이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그의 의를 구현하는 결실로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결단의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국민의 여론에 초조하게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정당과 후보자들은 짧은 환호와 탄식의 순간이 지난 뒤 그 선거 결과로 짜인 구도와 체제 아래 다시 길게 4년간 이 땅의 정치판을 지배할 것이다. 그들 300명을 위해 매년 보좌진 포함 1인당 6억의 혈세를 투자하게 될 것이고, 이는 4년간 7200억(1800x4)원의 세비와 부대 비용의 지출을 의미한다. 내가 투표하는 대상이 이런 규모의 국민 혈세를 투여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정당인지 인물인지, 또 그 결과가 나와 다수 서민들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될지, 무엇보다 그들의 정치 행위가 민족사의 비극적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공평과 정의의 열매로 귀착될지 심각하게 자문하고 신중하게 따져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한다. 나와 가족, 우리 교회의 일상적 평강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번 총선을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며 참여하자. 흑색선전이나 기만적 군중심리, 연고주의의 광풍, 특정 개인의 카리스마적 선동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 각자의 주체적 투표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 땅, 이 나라 백성들의 삶 한가운데 확실히 이루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새롭게 뽑히는 지도자들의 선한 정치적 공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차정식 /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전주 열린가정교회 담임목사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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